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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Aug 04. 2024

다시 만나 다행이다

                         례성데레사성당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빛의 기억과 흔적




처음 성당에 간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같이 놀던 친구가 이제 그만 가야 한다며 일어서는게 아쉬워 따라나서 도착한 곳이 성당의 주일 학교였다. 맛있는 간식도 주고 노래도 부르고, 친구와 계속 놀 수도 있어서 좋았지만, 실은 그날 나를 사로잡았던 건, 어린이 미사 전례에 드문드문 앉은 어른들의 머리 위에 씌워진 눈처럼 하얗고 공주님 드레스같이 하늘거리는 미사포였다. 나도 그걸 쓰고 앉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면, 마치 초록빛 지붕 창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나무 ‘눈의 여왕’을 바라보며 맹랑한 기도를 올리던 ‘빨간머리 앤’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길로 주일 학교에 등록하기도 전에 엄마한테 미사포를 사달라고 졸라댔고, 매주 '새하얀 베일을 머리에 쓰고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열심히 성당에 갔다. 매주 토요일 오후 어딘가를 가는 나를 따라나선 엄마가, 그리고 주말 오후마다 어딘가를 가는 며느리와 손녀를 찾아나선 할머니가, 차례로 카톨릭 신자가 되었고, 나는 다른 아이들 따라 어어어...? 하다가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고 ‘데레사’가 되었다.      


어느덧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된 엄마 손에 이끌려 고3 때까지는 어찌어찌 주일마다 미사를 드렸고, 대학에 가서도 얼마간은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솔직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심으로 충만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 행하는 주말의 일상 정도였다.

이제 막 새내기가 된 스무살 천방지축 망아지같던 내게는 이제 하얀 미사포를 쓰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는 일보다 훨씬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들이 너무 많았다. 주말 미사를 빠지고 고해성사를 하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점점 결국 영영 ‘길 잃은 어린 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거의 20년이 넘게, 나는 하느님 없이도 잘 살았다. 가끔 급할 때, 무서울 때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때도 ‘하느님 아버지’ 보다는 ‘엄마야’ 소리가 먼저 나왔다. 내게 하느님은, 마치 공기 같은 존재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거기 있다고 믿는. 그분이 거기 계심을 분명히 믿기는 하지만, 공기를 사랑하고, 공기에 의지하지는 않듯이,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느님 아버지’ 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고 가식이 아니겠냐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성당에 안가는 구실을 찾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당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엄마의 기도문에는 ‘데레사를 아버지 앞으로 다시 불러주소서’ 라는 구절이 추가되었다.      


풍파없는 인생인 줄 알고 자만하고 살던 어느날, 좋은 인연인 줄 알았던 관계가 악연이 되고 '그 일' 이 벌어졌다. ‘그 일’이 일어나고, 나는 그야말로 폭풍우 몰아치는 밤바다 속에 던져진 가랑잎 배같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해 본 걸 만회해보겠다고, 잃어버린 걸 조금이라도 되찾아보겠다고,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보겠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냉정을 잃고 조급한 마음에 내린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이 겹쳐 구멍은 점점 커지고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성인 여자 어른의 평균 키인 내가 35kg까지 살이 빠지고, 잇몸이 녹아내려 충치도 안 먹은 이가 4개나 빠지고, 심지어 손톱도 바스러지며 손톱 밑 살들이 들려 나왔다. 깨어있으면 죽고만 싶어서 신경정신과에서 처방한 약을 먹고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가, 깨면 또 울고, 후회하고, 머리를 짓찧으며 자책하고, 죽고 싶어서 또 약을 먹고 잠들고....이러기를 거의 몇 년을 반복했다. 드라마에나 나오는 병명인 줄 알았던 ‘공황장애’ 가 내 일이 되었다. 시시때때로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다 못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고, 고산지대 등산이라도 하듯 자주 숨이 가빠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그럴 때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아이가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 일’ 의 여파로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고 몰아쳐서 돈을 마련할 일은 자꾸 생겨났다. 하루하루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사람도, 건강도, 재산도, 자존감도 모두 잃고 뭐라도 붙들지 않고는 영영 일어날 수도 없을 것 같던 그 때, 어렵고 급할 때만 하느님 찾는 건 가식이고 위선이라며 시건방을 떨던 내 입에서 이번에는 ‘엄마’ 소리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 살려주세요’ 소리가 먼저 나왔다. 성당에 가면 숨이 좀 쉬어질 것도 같았다. 남편과 같이 집 근처 성당을 찾아 일요일 마지막 저녁 미사에 참여했다. 19년 만이었다. 모든 것을 부처님 은공으로 여기시는 어머님 밑에서 자라 성당이나 교회 근처에도 와본 적이 없는 남편은 물론이고, 너무 오랜만에 성당에 온  나 역시 미사의 전례 순서나 기도문 등이 새삼스럽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랜 냉담 끝에, 넘어진 어린아이가 ‘엄마,엄마’ 부르듯이 ‘아버지 아버지 살려주세요’ 하고 내 발로 성당에 오고서도, 나는 꽤 오랫동안 순하게 하느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온 몸으로 반항했다.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이 모든 일이 그 분이 꾸민 일만 같았다. 나를 이렇게 다시 불러내시려고 이런 일을 겪게 하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손을 모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팔짱을 끼고 앉아 제대 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노려보며 하느님을 원망했다. 당신 아들이 저렇게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니, 너도 좀 당해봐라. 이겁니까? 당신 외면하고 길 잃고 헤매는 제가 이렇게 하면 당신 앞에 다시 무릎 꿇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이 방법이 진짜 최선이셨습니까? 좀 덜 아프게 부를 수도 있었잖아요. 이렇게까지 가진 걸 다 뺏고, 기어이 제 발로 기어서 오도록 만드십니까?      


미사 시간 내내 나는 기도문을 따라 암송하지도, 찬송가를 따라 부르지도 않고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른 신자들이 복음 말씀에 따라 일어나 기도할 때도 나는 일어나지 않고 골난 어린애 마냥 발 끝만 내려다보며 앉아있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미사 시간 내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주말마다 성당에 가기는 갔다. 골부리면서도 엄마 치맛자락 놓칠까 겁먹은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그래요 나 왔어요. 봐요. 이렇게 형편없이 망가져서 당신 앞에 온 거 보니 속이 시원하세요? 좋으세요?’ 바락바락 악을 쓰며 하느님께 대들었다.      


숨이라도 좀 쉬어질까 성당에 왔는데 하느님께 반항만 하며 몇 주가 흘렀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항상 제대 쪽을 바라보는 왼쪽 앞쪽 줄에 앉았다. 바로 앞에 큰기둥이 있어서 신부님 얼굴이 안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노려보는 내 눈이 신부님 눈하고 마주치기라도 할까 걱정 없이 마음껏 반항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바로 앞줄은 미사 전례 봉사자들의 자리였다. 미사의 순서와 기도문, 찬송가 번호등을 제대 양옆에 설치된 큰 TV 스크린에 띄우거나, 봉헌함을 들고 나가는 등의 미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들이었다. 20년 만에 다시 성당에 간 첫날, 나는 가슴이 또다시 터질 것 같이 두 방망이질을 치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앞줄에 앉은 전례 봉사자 중 한 분의 뒷모습이 영락없는 ‘그 사람’이었다. ‘그 일’의 원인이 된 나의 악연.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수백번, 수천번 후회로 머리를 짓찧게한 그 사람. 나중에 앞모습을 보니 그 사람은 아니었지만, 머리 모양이나 유난히 처지고 좁은 어깨, 적당히 살집있는 뒷태가 너무 똑같아서 그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그리고 또 하느님께 따져 물어댔다. 이것도 당신 계획이죠? 이렇게 저를 불러놓고 ‘하필이면’ 똑같은 사람을 ‘하필이면’ 제 앞줄에 앉혀놓으셨나요? 진짜 너무하십니다. 일요일 저녁 8시 미사 전례 봉사자는 한동안 같은 분들이었고, 나는 매주 성당에도 가기 전에 ‘그 사람’을 또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지없이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지곤 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막상 가서는 반항하고 악을 쓰면서도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가기는 갔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간간히 복음 말씀도 듣고, 신부님 강론도 서서히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복음 말씀과 신부님의 강론 내용은 매주 달랐지만, 하느님은 항상 너를 기다리시고, 너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메시지는 한결 같았다. 거짓말.... 웃기지 마세요. 나를 기다리신다는 분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패대기치시나요. 제대 뒤에 신부님도, 십자가의 예수님도, 안보이지만 분명 ‘여기’ 계시는 하느님도 다 꼴보기 싫고 미웠다. 결코 하느님 ‘보시기 좋더라’ 할 수 없는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나의 상황은 여전히 나아진 게 없었고, 그 일의 여파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여기저기서 예고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정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며 매일 아침 듣는 93.1 FM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퀴즈 코너가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퀴즈를 내고 정답을 맞춘 청취자 5명을 뽑아 커피 쿠폰이나 과자세트 등을 주었는데, ‘음악사에서 작곡가 헨델을 부르는 별명은 무엇일까요? 하는 질문에 ‘1번 음악의 어머니, 2번 음악의 언니, 3번 음악의 고모, 4번 음악의 이모’ 이런 식으로 황당할 만큼 우습고도 쉬운 보기를 주어서 누구나 맞출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었다. 번번히 문자를 보내보지만 단 한 번도 당첨된 적은 물론 없었다. 그런데, 그날 문득 엉뚱하게도 하느님한테 당돌한 내기를 제안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기도하면 다 들어준다고 하셨는데, 저 다음 주까지 꼭 돈이 마련되야 해결되는 문제가 있어요. 물론 알고 계시겠죠.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신다면서요. 그런데요, 간절히 기도하면 진짜 해결해주실지, 솔직히 기도하면서 자꾸만 의심이 들어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것도 당신 탓 같아 원망스러운데 어떻게 온전히 믿고 기도가 나오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보여주세요. 당신이 진짜 저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요. 오늘 이 퀴즈에서 5명 중에 제가 뽑히면, 제 문제도 틀림없이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의심없이 기도할게요.’

하느님이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당장 증명하면, 나도 온전히 믿고 기도를 하겠다는 그런 오만방자한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들으셨으면 기함을 할 노릇이었다. 돌아온 탕자 데레사는 여전히 그렇게 삐딱선을 타고 하느님을 시험하겠노라며 퀴즈에 정답을 보냈다 음악이 끝나고 진행자가 정답자 5명의 전화번호 끝자리를 불렀다. 기적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마저 났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황당한 요구를 그분이 들어주실 리가 없잖아.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집 주차장으로 돌아올 때 쯤이면 방송의 마지막 음악이 흘러나온다.

보통은 마지막 음악을 듣지 않고 내리는데, 어쩐지 그날은 마지막 곡까지 듣고 싶었다.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끝자리 0000쓰시는 분이 신청하신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C단조....”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 뒷자리 번호였다. 내가 음악을 신청한 적은 없기에 내 번호일리는 없었다. 우연히 나와 같은 뒷자리 번호를 쓰는 사람의 사연이 뽑힌 것이었다.퀴즈의 정답자로

뽑아달라고 방송에 문자를 보냈는데, 심지어 내가 보내지도 않은 문자가 뽑혔고, 결과적으로 내 기도대로 내 번호가 방송에 불리웠다.

‘내가 너를 보고 있을 뿐 아니라, 너의 뜻대로가 아닌 나의 뜻대로 너의 기도에 응답했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과연 하느님다우셨다. 맹랑한 나의 내기를 아량있게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허를 찌르는 방법으로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신 게 아닌가.

’감히 당신을 시험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의심없이 주님 앞에 도와달라 기도를 드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면 주기도문을 중얼거렸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고, 정말 기적같이 마지막 순간에 딱 필요한 만큼의 돈이 마련되었다. 그 후로도 ’정말 이제는 방법이 없구나‘ 하는 순간에 딱 그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돈이 융통되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는 등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낼 수 없을 방법으로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었다.

    

그 후로, 미사 시간에 더 이상 십자가를 노려보며 음악을 듣는 일은 없었다. 일요일 저녁마다 집 근처 쇼핑몰에서 장을 보고 외식을 하던 루틴 대신에, 남편과 아이와 함께 미사에 참여했고 함께 기도드렸다. 그해 여름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가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으며, 그 해 겨울 11월,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19년 만에 하느님 앞에서 다시 결혼했다. 원래 결혼할 때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카톨릭 신자면 속세의 결혼식 전에 혼배성사를 하는 것이 교회법이나 결혼 당시 이미 오랫동안 냉담 중이었던 나는 그것조차 건너뛰었었다. 결혼 19주년이었던 2023년, 우리 부부는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데레사‘와 ’요한‘으로 다시 성가정을 이루었고, 아들 ’베드로‘가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었다.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성당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 쇼핑몰에서 의미없이 보냈던 주말 저녁 대신, 이제 결혼 1년 차인 남편과 함께 기도와 찬송으로 성당에서 한 주를 마무리하고, 매일 밤 잠들기 전 세 가족이 함께 주님의 기도를 암송하며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는 작은 일상이 참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기당한 돈을 돌려받거나, 눈물을 머금고  매도한 아파트 등기가 다시 돌아와 있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 생활 20년간 일군 재산이 단 몇 년만에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지 않고, 미치고 팔팔 뛰도록 아깝고 분해서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잦다. 그러나 적어도 그 원망을 하느님께 하지는 않게 되었다. 모든 책임이 다 나에게 있으며, 그 사람과의 악연도 결국 내가 초래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누구에게 향한지도 모르게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벼리던 칼날이 조금씩 무디어져 갔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고 스스로를 칭하기에는 여전히 나는 철없는 ’돌아온 탕아‘의 태를 벗지 못했다. 새벽 기도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남을 위한 기도보다는 내가 급해서 나를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가 우선이며, 일주일에 한번 주말 미사에 참석하는 게 전부이면서 그나마 가끔 지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캄캄한 밤, 폭풍우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발가벗고 서 있는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꼭 붙잡고 설 큰 나무를 만나 그 아래서 비바람도 피하고, 나뭇잎 따서 옷도 만들어 입은 느낌이다. 그리고 함께 비바람을 견뎌줄 남편과 서로 손을 더욱 꼭 잡게 되었고, 꼭 잡은 손아귀 힘만큼 조금은 단단해져가는 느낌이다.   


“하느님을 다시 만나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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