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말고 통속소설
취향의 발견
12.
카페에 들어서는 희진을 보자 해나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희진이 손에 들고 있는 건 해나가 장바구니에 담아둔 것 중 가장 비싼 진녹색 가죽 클러치였다. 명품 가방 하나 없는 해나였지만, 백화점에서 근무할 때 쇼 윈도우에서 본 진녹색 핸드백은 유독 해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나는 햇살이 미치지 않는 깊은 숲의 가장자리에 솟아오른 나무를 생각했다. 해의 기운을 품고 있으면서도 어둠을 발하는 그 짙푸른 녹색은 숲의 정령처럼 해나를 매혹시켰다. 가죽도 그런 색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밤 해나는 백화점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서 그 가방을 찾아보았다. 같은 브랜드에는 천만원이 훌쩍 넘는 가방도 많이 있었다. 해나는 생각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놀라며 조심스럽게 장바구니에 그 녹색의 욕망을 담아보았다. 소소한 해나의 취향들이 담겨있던 장바구니의 결제 금액이 댐이 무너지듯 순식간에 700만 원으로 흘러 넘쳤다. 그때 진석이 그랬었다. 무슨 가방이 그렇게 비싸? 저것도 진석이 선물한 걸까. 해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김진석을 아는지 물었을 때 희진의 얼굴에 떠오른 건 의아함도 당혹감도 아닌 반가움이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상대도 알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접점으로 인해 상대와 더욱 친밀해질 수 있겠다는 순수한 기쁨 같은. 진석과 해나의 관계가 단순한 지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의심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이는.
당황한 건 오히려 해나였다. 뜨거운 커피를 얼굴에 들이붓거나 머리채를 잡는 장면 따위를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반가워하는 반응은 전혀 예측 밖이었다.
-어? 제 남친 이름인데? 언니는 진석 씨를 어떻게 알아요?
불쾌라고는 일도 없는 호의적인 질문에 해나는 6년을 만난 남자친구라고 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 말에 잠시 해나를 빤히 보던 희진이 말했다.
“아.....”
“.... 아....?”
“언니를 오래 만나서 선물 고르는 취향이 그랬나 보다. 어쩐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제가 판매하는 물건을 같은 분이 계속 구매하길래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언니한테 선물했던 거 저한테 한 거예요? 같은 걸로?
이제는 익숙해진 희진의 그 까르르 웃음소리를 들으며 해나는 자신이 그녀의 커닝 페이퍼였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진석과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당부에 희진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언니, 결혼하는 거 맞아요?
-무슨 뜻이에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희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의 의미를 해나는 읽을 수 있었다. 해나의 커닝 페이퍼로도 희진은 진석에게는 해독 불가의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쉽게 풀리지 않아 더 끌렸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해나 자신은 이미 여러 번 풀고 풀어 정답을 빤히 아는 쉽고 지루한 문제였을 테고.
-어차피 연락은 늘 오빠가 먼저 하니까 오빠가 연락 안 하면 더 이상 연락할 일은 없을거예요.
-그럼... 선물은 왜 받은 거예요.
-주니까 받았죠. 뭐 잘못 됐어요?
희진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해서, 해나는 오히려 그걸 묻는 자신이 이상하다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치만, 언니가 여자친구인 거 알았다면, 아니, 아니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거 알았다면 안 받았을 거예요. 본의 아니게 미안해요. 어떡해... 언니 상처받으셨겠어요.
희진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오빠한테 연락 와도 안 받을게요. 나는 괜찮아요.
누가 누구한테 괜찮다고 하는 거지. 해나는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토끼 굴 속의 트럼프 카드 여왕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희진은 눈을 찡긋하며 해나를 위로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한마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해나는 확실히 알았다. 희진을 찾아간 것부터 잘못이라고 후회했다. 녹색 가방을 가리키며 해나가 물었다.
-그것도 팔 건가요.
-이거요? 아아뇨? 이걸 왜 팔아요. 딱 제 취향 저격인걸요.
희진은 생긋 웃었다.
-6년이면 언니, 좀 지겨울 수 있죠. 헤어질 거 아니면 언니가 이해해요. 남자들이 좀.. 그런 거 있잖아요. 결혼할 거라면서요.
희진은 해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일어섰다. 갈게요.
-저기요. 해나는 돌아서는 희진의 뒤에 물었다.
-진석이는 희진 씨에게 어떤 사람이었어요.
희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음.. 아무것도 아닌 사람?
희진의 입가에 슬쩍 비웃음이 어렸다.
해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참패였다. 애초에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상대는 나와 싸울 생각조차 없다. 내가 누군지 관심도 없다. 나는 지금 여기서 저 아이와 뭘 하고 있나.
진석이 선물한 물건을 계속 중고 거래품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희진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 진석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해나는 정답지를 손에 들고서도 오답을 써낸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6년간 진석을 만나며 해나는 둘이 주고받은 쪽지 하나까지 버리지 않고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진석이 처음 사준 반지, 진석이 처음 사준 음반, 처음 떠난 여행지에서 진석이 골라준 목각 인형, 아무리 작은 것도 진석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해나에게는 그것들은 반짝이는 보석 이상이었다.
어린 시절 동생과 시장에 갔다가 동생을 잃어버렸던 기억나니. 미친 듯이 동생을 부르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어둑할 무렵 집으로 돌아왔는데 동생은 이미 집에 와 있었어. 엄마와 동생이 다정하게 앉아 웃으며 밥을 먹고 있더라. 간신히 버티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고, 안도감이 쏟아져 내리며 눈물이 왈칵 났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문가에 서 있는데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지. “어딜 갔다 이제 와. 동생 혼자 두고.”
왜 지금 그때 생각이 났을까. 해나는 잃어버린 줄 만 알았던 동생이 무사히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동생을 잃어버렸던 사실에 가슴이 터질 뻔했다는 걸 동생도 엄마도 모르는 것 같아 왠지 슬펐었다.
해나는 희진이 자신을 전혀 경계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측은하게 여겼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건지, 자존심이 상하는 건지, 속이 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돌아서며 설핏 보였던 희진 입가의 미소는 분명 비웃음이었다. 처음 진석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 보였던 반가움이 실은 무관심의 다른 표정이었다는 걸 해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과 함께 희진의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이 진석의 두 달 치 월급을 훨씬 넘는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해나는 핸드폰으로 은행 계좌를 열어 진석과 함께 모으고 있는 결혼 자금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미친... 새끼....”
해나는 나직한 탄식과 함께 한 번도 뱉어본 적 없는 욕을 했다.
통장의 잔고는 제로, 텅 비어있었다.
해나가 차례로 내놓은 메리제인 구두,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커피잔을 본 진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다 뭐야.
-이게 다 뭔지 내가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넥타이핀 어디 두고 왔는지 알고 있었어. 이 구두랑 옷, 커피잔...
-이거였구나. 희진이가 그만 만나자고 한 이유가. 대체 걔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리고 가방도.
-가방? 무슨 가방?
다른 건 다 인정하는 듯한 진석이 가방 이야기에는 정색을 했다. 장바구니에 있던 녹색 가방이야기를 하자 진석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너, 9급 공무원 월급이 얼만지 너 알아? 내가 무슨 재주로 걔한테 그런 걸 사주겠어.
진석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해나는 잔액이 0원이 된 통장 잔고 화면을 보여주며 해명을 요구했다.
-가방 산 거 아니야.
-그럼?
-다른 데 썼어.
-다른 데 어디?
진석은 주식 리딩 채팅방에서 그동안 둘이 함께 모은 결혼 자금을 모두 날렸다고 했다. 이럴 때는 뭘 물어야 하나. ‘왜’ 그랬니. ‘언제’ 그랬니.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해나는 그저 멍하니 진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6년을 매일 보아온 그의 얼굴이 생경했다.
-대체, 왜... 어떻게..
-그깟 푼돈 모아서 니 말처럼 결혼을 했다고 치자.
다정하던 진석은 이제 없었다. 낯선 이의 얼굴을 하고 선 남자가 악에 받친 얼굴로 씹어 뱉듯 말했다.
-백화점 계약직 너는 흙수저. 9급 공무원 나는 그 잘난 숟가락도 없어 맨손으로 밥 퍼먹어야 돼. 이런 우리가 결혼을 한다고? 결혼해서 애를 낳아서 뭐 싸구려 플라스틱 수저라도 물려주게?
-왜 그렇게 생각해. 너도 이제 직장 있고, 우리 같이 하면 되잖아.
-너랑 같이 궁상떨기 싫어. 너랑 같이 해봐야 둘이 똑같이 아등바등 지지리 궁상밖에 더 돼?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해나 너도 나한테 실망하잖아. 5년을 뒷바라지했는데 너도 본전 생각날 거 아냐.
-그래 실망했어. 실망을 넘어 절망이야. 근데. 그건 니가 사법시험에 떨어져서가 아니야. 진석아, 나는 네가 사법시험에 합격했어도 똑같았을 거야. 네가 결국 1차 시험 한번 통과 못한 채 포기하고 9급 공무원이 돼서 실망한 게 아니라구.
-너 자신에게 좀 솔직해. 너 공부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치열했던 적 있어? 결과에 후회 없이 떳떳할 수 있다고 말할 자신 있어?
-너.... 계속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있었구나.
-공부하는 동안 선배들 후배들이 부르는 자리 너, 마다한 적 없었어. 나 만나는 약속은 건너뛰는 한이 있어도 밥자리, 술자리 있으면 너 꼬박꼬박 나갔잖아. 나 같으면 자존심 상하고 민망해서라도 합격하기 전에는 얼굴 안 비친다. 그랬을 거야.
-니가 남자들 관계를 알아? 그니까 너는 지금 그렇게 공부하는 시늉만 하다가 결국 다 물먹고 말단 공무원이나 된 내가 한심하다.. 이거지?
-그래! 한심해! 한심해 죽겠어. 사시 합격 못하고 공무원이 된 니가 한심한 게 아니라. 너의 의지박약과 줏대 없음을 비겁하게 제도 탓으로 돌리는 너의 그 찌질함이 한심한 거야.
-악!
지니에게 당근으로 사 온 푸른 꽃무늬의 컵이 벽에 부딪혀 박살 났다. 푸른 줄기의 패턴이 점점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날 밤 진석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해나는 자신이 더 이상 잃어버린 동생을 찾던 어린아이가 아님을 알았다. 다시는 못 찾을까 봐 두렵지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지도,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동안 뭘 찾고 있었을까. 해나는 다만 점점 차가워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램프의 요정은 희진이 아니었다. 스스로 램프 속으로 들어가 갇힌 해나 자신이었다.
이수는 눈을 감았다. 지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중학교 2학년 때였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었고, 거기서 둘은 어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늘 같이 앉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 일로 토라져서 ”오늘은 다른 친구랑 앉아서 갈래“ 그렇게 된 거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뉴스에도 크게 났었는데.
-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사고가 나서 아이들이 많이 다쳤고, 그중 몇 명은 그 자리에서 혹은 병원 치료 중에 죽었어. 버스가 왼쪽으로 기울어 넘어졌다나 봐. 오른쪽에 앉았던 아이들은 대부분 골절이나 찰과상 정도였는데 왼쪽에 앉은 아이들이 중상이 많았대. 사망자도 전부 왼쪽에서 나왔고. 지독히도 운이 없던 왼쪽 아이들 중 한 명이 지교였어. 병원에 옮기기 전에 이미 죽어... 그랬다나 봐.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지교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때, 내가... 옆에 앉으려던 지교에게 눈을 흘기지만 않았더라면, 그냥 툭 털어버리고 여기 앉으라고 평소처럼 옆좌석을 탁탁 치며 씨익 웃었더라면, 너 말고 오늘은 다른 애랑 앉아서 가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럼 지교는 살아있었을까. 지금의 나처럼 직장도 다니고, 친구들과 술도 먹고, 연애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랬을까...
-뭘 해도 죄책감이 들어서 맨 정신으론 살 수가 없더라. 지교랑 같이 있었을 때도 쌈닭은 내 몫이었어. 얼굴은 똑같았지만 우리는 성격이 정반대였거든. 소심하고 여린 지교를 대신해서 말싸움이 필요하면 내가 지교인 척 나서기도 했어. 내가 지교 대신 죽었다면, 그래서 걔가 나인 척하고 살았으면 죄책감이 덜했을까. 아니 죽어버리면 죄책감 같은 거 못 느끼겠지? 이제 알겠니. 나는 행복하면 안 돼.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거든. 미안..
이수가 감았던 눈을 떴다. 마주 앉았던 지란 대신에 빈 벽만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이 자리에서 지란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그녀가 앉았던 빈 공간에 여전히 떠돌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던 이수는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찻값을 계산했다.
-요즘은 혼자 오시네요..
이미 여러 번 혼자 왔지만, 모른 척하던 카페 주인이 오늘은 심상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눈치 없는 안부가 아닌 다정한 위로에 이수는 카드를 돌려받으며 작게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카페 밖으로 나온 이수는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할 차례라고.
13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