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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발견 13

by 한아

취향의 발견


13.

-안원장한테 전화를 했더니 여길 알려주더라.

10년 만에 만난 엄마는 마치 아파트 같은 단지 내 옆동에 사는 친정 엄마처럼 불쑥 병실로 들어섰다. 엄마는 재민의 머리맡에 서서 자는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너랑 꼭 닮았네.

링거병의 수액을 조절하던 간호사가 재민과 윤경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웃었다.

-엄마가 워낙 예쁘셔서, 저희는 처음에 아들이 아니라 따님인 줄 알았어요.

-얘가 어릴 때부터 아주 예뻤답니다. 손주가 딸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간호사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짓는 엄마를 바라보는 윤경의 시선에 경멸이 가득했다.

-나와요. 애 깨.


반쯤 소등된 어둑한 소아과 의국 로비에 앉은 윤경의 서늘한 표정에서 푸른빛이 반사되었다. 나란히 앉은 모녀는 각자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 들어와 살까 하는데.

-그 남자는 어쩌고.

-갔어. 작년에.

-그냥, 살던 대로 살아. 나 엄마 죽었다고 생각한 지 오래야.

-야, 이 기집애야, 너 엄마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엄마도 나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엄마는 나도 죽이고 아빠도 죽인 거야.


윤경은 엄마에게 끝까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병실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칫했으나.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 그녀가 있어도, 없어도 마음이 널을 뛸 것 같아서 차라리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병실로 돌아오니 재민이 깨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윤경은 재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만히 안았다. 만화 영상을 보던 아이는 방해를 받자 짜증을 내며 거칠게 윤경을 밀어냈다. 그녀는 아이를 안았던 느낌을 가만히 몸에, 가슴에 새겨보려 했다. 윤경은 자신의 배에 한 손을 올려보았다. 방금 아이를 안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날, 학교 앞에서 팔던 노란 솜뭉치 같은 병아리를 손바닥에 올렸을 때,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던 작은 두근거림. 먼 곳에서 규칙적으로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가 부드러운 솜방망이처럼 손바닥을 두드리는 그 느낌은 포근하면서도 경이로웠다. 윤경은 재민의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주었다. 달콤하면서도 콤콤한 아가의 쉰 냄새가 코에 훅 끼쳤다.




일주일 뒤 재민은 퇴원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등원한 후, 오랜만에 오전 시간이 여유로워진 윤경은 지란과 해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유부인 컴백’ 기념으로 ‘애데렐라 타임’ 전에 점심 살게. 해나 쉬는 월요일 어때?

해나는 백화점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지란의 답변이 먼저 올라왔다.

-콜. 대신 나 있는 근처로 와줘.

전화기를 손에 든 해나는 망설였다.

-해나는 내가 데리고 갈게.

해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지란의 문자가 올라왔다. 그녀다웠다. 해나가 침잠하려 할 때마다 지란은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내밀었다. 아니 손을 내밀었다기보다 말없이 뒤에서 떠밀어주었다. 남들이 보기에 배려가 부족하다거나 막무가내로 여겨질 수 있는 지란의 그런 거친 행동과 말투가 해나에게는 보드라운 위로가 되어주었다. 해나는 그런 지란이 고마웠다.




정오의 브런치 카페는 지란의 표현에 따르면, ‘한가한 여편네’들로 넘쳐났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연락 한번 없는 이수 때문에 지란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자신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릴 줄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혼란스러운 상실감이 지란의 혀끝에서 날카로운 가시로 돋아났다. 오늘 지란은 시비를 걸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다고 해나는 생각했다.


-니들 무조건 제일 비싼 거 먹어. 오늘, 내가 쏠게. 재민이 돌보느라 수고 많았다고 남편이...

윤경이 플래티넘 카드를 흔들었다. 지란이 눈살을 찌푸리는 걸 맞은 편에 앉은 해나가 눈치를 채고 윤경에게 일부러 환하게 말을 걸었다.

-재민이는 이제 괜찮아?

-아이가 아프니까. 나도 힘들더라구. 이래서 엄마들이 애들 아프고 나면 한 번씩 몸살이 나나 봐.

-이제, 제법 엄마티가 나네.

해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내가? 윤경은 뭔가 말을 이어서 하려 하다가 이내, ‘아니다’ 혼잣말처럼 말하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뭔데 말을 하다 말아?

눈치 빠른 지란이 물었다. 별거 아니야. 윤경은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아닌 게 아닌데. 무슨 일 있어?

지란의 집요한 질문을 피하듯 윤경이 해나에게 시선을 주며 잔소리를 했다.

-너는 언제까지 진석이 뒷바라지할 거야.

-해나 지가 좋아서 한다는데 냅둬. 또 시작하지 말고.

지란의 볼멘소리에 윤경의 화살이 그쪽을 향했다.

-너도 이제 그만 재고 이수가 너 좋다고 할 때 결혼해. 이제 곧 아무도 너 여자로 안 봐. 재민이 아프고 보니, 나도 이제 좀 진짜 엄마가 된 같아. 진짜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 같은거..있지. ’내 가족‘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거.. 그런 거 있어.


지란이 피식 웃었다. 윤경이 그 웃음에 바로 반응했다.

-왜?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야? 그 웃음은?

-아니라구.

-너, 그거 지금, 그냥 웃는 거 아니잖아. 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기분 나쁘게 굴지 말고.

-해나도 나도 문제 있는 거 알아. 니 눈에 보기엔 우리가 한심하겠지...근데, 적어도 우린 우리가 그렇다는 거 인정해. 나도 알고, 해나도 주제 파악하고 있어. 근데 넌 참...

-나는 참 ...뭐.?

-관두자.

-너 오늘 내내 뾰족하게 구는데.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니? 대체 왜 그래?


지란이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지란의 목소리엔 물기라곤 없었다.

-남편 돈으로 편히 살고는 싶고, 속물인 건 인정하긴 싫고 그 와중에 진짜 사랑하는 척까지 하고 싶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도둑놈 심보니.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해. 아닌 척, 고상한 척하지 말고.

좌불안석이던 해나가 지란의 팔을 꽉 잡고 작게 속삭였다.

-그만해.

-아니, 그만할 거 없어. 더 들어보자. 뭐라고 하는지.


윤경과 지란의 날 선 시선이 테이블 위로 팽팽하게 부딪쳤다. 윤경은 탁!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니들, 나 무시하는 거 알아. 뼛골까지 속물이라고 재수없어 하는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특히 너! 송해나! 쥐뿔도 없는 진석이 고시 뒷바라지 몇 년째 하면서 니 월급 다 갖다 바치고. 골수까지 쪽쪽 빨리믄서, 니 사랑은 순정이고 지고지순이고 절절하고, 나는 천박한 속물이라고 무시하는 거 다 보여. 차라리 지란이처럼 욕을 해.

윤경의 화살이 가만히 있는 해나에게 향했다. 해나는 기가 막혔지만 여기서 자기까지 흥분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을 알기에 침착하려 애를 썼다.

-너희들 둘 다 오늘 진짜 왜 이래. 술도 안 먹고 취했어?


해나의 애씀이 무색하게 지란의 서늘함은 얼음장 같았다.

-무시는 니가 우릴 무시했지. 너, 니네집 망하기 전에 우리하고 말 한번 섞은 적 있어? 니네집 부도나고 망했다고 다른 애들 수군거릴 때, 늘 해나가 니 앞에 서서 막아줬어. 비싼 과외 다 끊기고 학원도 못 가게 된 너, 그제서야 나한테 와서 수학 문제 물어보면서 말걸드라? 그런데도 우리가 널 무시해? 니가 우릴 무시했지. 공주님이 어디 감히 거지 같은 것들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 니네 집, 그렇게 안됐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친구라고 마주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윤경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니가 뭘 알아? 부잣집에 태어난다는 건 날 때부터 마약에 중독돼서 나온 거랑 마찬가지야. 난들 알았겠니? 내가 유복한 환경에 태어나게 될 줄?

지란이 소리 내서 웃었다.

-유복한 환경이랜다. 야, 무슨 개화기 소설 쓰니?

지란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리고, 윤경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편한 거, 존 거 한번 맛 들여 익숙해지면 저얼대 빠꾸는 못하는 게 인간이야. 그건 마약 중독보다 빠져나오기 더 힘들거든. 몰랐으면 모를까. 어릴 때부터 뼛속까지 흐물거리게 편히 살게 해 놓고 갑자기 이렇게 망해버리고 그걸 어린 나보고 감당하라고? 누가 첨부터 부자로 태어나게 해 달랬어? 달라고도 안 했는데 다 줘놓고 누구 맘대로 쫄딱 망해서 다 뺏어가? 줬다 뺐는 게 더 나빠.

-그래서, 뺏긴 걸 결혼으로 찾겠다고 발악을 했구나.

-나한테는 이게 사랑이야. 내가 잃은 것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최고의 아내이자 그 사람 자식에게 최고의 엄마가 될 수 있어.


이제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해나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니가 잃은 게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네 자존감,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아닌지 생각해 봐.

-해나, 잘났다. 그래 너 잘났어. 애초에 싹수노란 고시생 호구노릇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잘난 척은.

해나를 향한 윤경의 날을 지란이 막아섰다. 오늘 윤경과 지란의 세치 혀는 잘 벼려진 칼 같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온통 칼날이 되어 서로를 베이고 상처 입혔다. 그러기로 작정한 두 친구들이었다.

-그만해 지나쳐 너!

-내가 지나쳐?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뭐 그렇게 대단해? 책임지기 싫고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서 비혼입네 머네 하면서 남자들 마음 가지고 놀잖아. 애들 장난처럼 매번 만났다 헤어지고, 그러고 또 금방 다른 사람 찾고. 너 마흔 넘어서도 그러고 다닐 수 있을 거 같아? 늙은 이모 같은 여자 퍽도 좋아라 하겠다.


지란은 윤경의 도발에 화를 내지 않았다. 윤경이 벌겋게 오를수록 지란은 차갑고 낮게 가라앉았다.

-못 들어주겠어 그만 좀 징징거려. 니가 뭔데? 왜 인생이 너한텐 한 순간도 빠짐없이 장밋빛 이어야 해? 너 뭐 전생에 유관순이었어? 나라라도 구했니? 무슨 자격으로 너의 모든 순간이 안락하고 풍요로워야 하는데?

-그만해... 지란아. 그만 좀 해 응? 윤경아 너도 그만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마.

해나의 만류에도 지란은 계속했다.

-등교도우미 100, 입주도우미 300. 가사도우미 200, 그리고 안정적이고 정기적인 섹스파트너 이건 시장가가 얼만지 모르겠네, 그 산업이 하도 폐쇄적이라.. 천? 이천?

-너...

윤경의 이제 온몸으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지란이 윤경을 똑바로 쏘아보며 차분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어갔다.


-그거 다 더해 봐. 한 달에 돈이 그게 다 얼마니? 안원장 입장에선 너를 아내로 맞는 게 훨씬 남는 장사지 안 그래? 정기적으로 보나스, 명절 상여금도 필요 없고, 공유 경제로 인한 혹시 모를 성병으로부터도 안전하고. 그러면서 여전히 타인과 공유되는 다른 여성과 즐길 수도 있고.

윤경이 메인요리로 나온 스테이크를 한입 베어 물더니 천천히 우물거리며 말했다.

-메인이 안정적이면 디저트는 가끔 건너뛰어도 상관없으니까. 너는 그러니까 안정적인 메인 메뉴 같은 거야. 배도 부르고 맛도 있고 건강하지만 자극적이진 않은?

-너 페미니스트들한테 고소당한다. 너는 여자 아니야?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말은 바로 하자. 나는 지금 여성을 성상품화 한다, 어쩐다...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야. 페미니스트들에게 고소당할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너는 사랑은커녕 좋아지지도 않는 남자를 결혼 업체에 웃돈까지 얹어주고 섭외해서, 6개월 만에 결혼하고, 그 남자와 운명 공동체가 되겠다고 나선 거잖아.

일도 그만두고, 애까지 딸린 그 남자의 아내가 되기로 원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아니라고 니가 이미 얘기했고, 기혼자라는 타이틀이 주는 사회에서의 떳떳함? 너의 가정을 꾸렸다는 안정감? 둘 다 아니잖아.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이용해서 그 남자가 주는 카드로, 니가 그토록 그리워 마지않는, 너 아까 뭐라고 그랬더라? 유복한, 풍족한? 암튼, 놀고먹는 생활을 유지하겠다는 거잖아. 그 대가로 너는 그의 아내 역할을 하는 거고. 가사 노동과 육아와 섹스를 포함해서, 아니야?

니가 니 할 일 하는 만큼 반대급부로 얻어가는 게 분명히 있는데 왜 너만 희생한 것처럼 징징거리는 건데? 누가 너보고 재민 아빠랑 결혼하라고 강요한 사람 있어?

니가 입주도우미로 살든, 가사도우미로 살던 나 알바 아니야. 그렇지만 니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판단하고 무시하지 마. 특히 너 같은 애 입에서 그런 말 나오는 거 불쾌해.


윤경이 자리에서 일어서 지란 앞에 섰다.

-나 같은 애? 나 같은 애가 뭔데. 너는 내가 창녀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버티고 선 윤경을 보고도 지란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게 있나 보지?

-야!!!!!


더 이상 참지 못한 윤경이 물컵을 들어 올려 지란의 얼굴에 들이붓고는 컵을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컵이 박살이 나고. 아까부터 흘긋거리던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매니저가 달려오고, 윤경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부짖는 윤경을 해나가 데리고 나온 테이블 위로 지란이 쓰러지듯 엎드렸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시끄럽게 해서.


흘깃대던 사람들이 엉망이 된 테이블을 모른 척해주었다. 먹다 남은 음식과, 엎질러진 물과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러 직원들이 왔다. 부산스런 그들의 움직임이 이어지는 동안 지란은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 지란의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건,

이수의 이름이었다.


-14화에 계속





<덧붙임> 이제까지 이 소설의 톤이 계속 그래왔지만, 특히 이번화는 거의 대사로만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록 대사 위주의 글이 되었네요. 드라마를 본다 생각하시고, 날선 여자들의 수다스런 대화가 좀 시끄러워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부족한 글에 귀한 조언 주신 소위님, 이번 화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에 보여주신 애정과 관심 잊지 않겠습니다. 부족한 글 매회 읽어주시고 정신없는 세여자의 이야기를 따라와주시는 작가님들 감사드려요. 이제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지지배들아 고만 좀 싸워라. 늙은 언니가 따라가며 써내려가기가 느무~ 힘들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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