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말고 통속소설
취향의 발견
15
-잘 지냈어요?
한 달 만에 만난 이수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뺨이 패이고 정돈되지 않은 수염 자국으로 꺼칠해진 이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지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니, 잘 못 지냈어.
지란은 내가 미안했다고, 겁이 나서 그랬다고 말하려 했다. 이수를 안으며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헤어져 있는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편한 적 없었다고. 너 없이는 안 되겠다고. 다시 시작하자고. 아니 처음부터 끝이 아니었다고. 헤어지자는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이수야...
-많이 생각했어요.
-나도, 계속 네 생각뿐이었어. 이수야. 우리...
-헤어져요. 그게 맞겠어요.
이수의 젖은 눈이 지란을 보고 있었다.
지란은 그날 자신을 바라보던 이수의 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 눈빛에 원망이나 실망 혹은 분노가 담겨있었다면 지란은 그날 그렇게 한마디 말없이 이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지교는 그저 핑계였다고, 다시 한번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기회를 준다면 이제까지의 시간도 앞으로의 시간도 우리에게 다른 의미가 될 거라고. 전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린 이수의 얼굴을 붙잡고 나를 좀 보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듣지 않고 일어서 가려는 이수의 옷깃을 붙잡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란은 그러지 못했다. 이수의 눈에 담긴 건 원망도 실망도 분노도 아닌, 슬픔이었다. 체념이었다. 무엇이 이수를 그렇게 슬프게 했을까. 자신과의 이별 때문에 이수에게 상처를 준 스스로를 지란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수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안 내리세요?
납골당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 기사의 목소리에 지란은 비로소 도착했음을 알았다. 평일 오후, 추모객의 발걸음이 뜸한 시간이어서 버스 안에는 지란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지란은 해마다 생일이면 사진을 찍어 지교의 유골함 앞에 가져다 두었다. 최대한 밝게 미소 지으며 찍은 그 사진은 살아있으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동생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내부 안치단 앞에 설치된 전면 통창으로 오후 늦게까지 깊숙이 해가 비쳐 들어 지란이자 지교인 소녀의 미소가 햇살에 더욱 반짝였다. 그런 날에는 지교를 두고 오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그녀의 시간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죄책감에 늘 무거웠던 지란의 마음이 햇살 한 줌의 무게만큼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지교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한 지란은 비에 젖은 채 납골당에 들어섰다. 물기를 털며 지교의 유골함 앞으로 다가갔을 때,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수였다.
-이수.. 야?
부르는 목소리에 이수가 돌아보았다. 울고 있었던 듯 눈가가 붉어진 이수는 당황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도망치듯 앞서가는 이수를 기어이 지란이 돌려세웠다.
-언제 왔니... 아버지 뵈러 왔어?
말없이 지란을 응시하는 이수의 손에 오래된 신문에서 오린 듯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햇살마저 들지 않는 비 오는 날의 납골당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반쯤 소등된 어둑한 소아과 의국 로비에 앉은 윤경의 서늘한 표정에서 푸른빛이 반사되었다. 나란히 앉은 모녀는 각자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 들어와 살까 하는데.
-그 남자는 어쩌고.
-갔어. 작년에.
-그럼 이제 또 다른 사람 찾아보지 그래?
-니 옆에 살면 어떨까? 재민이도 봐주고. 너도 언젠가는 안서방 하고 사이서 애 낳을 거 아냐. 그럼 걔도 내가 봐줄게. 황혼육아 질색이라 딸년 옆에 얼씬도 안 한다는데, 넌 무슨 복이니.
윤경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배에 손을 얹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 엄마는 그때 우리 버린 거야. 남편도 모자라 자식까지 버린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손주를 봐준다는 거야 웃겨.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그때 안 그랬으면 너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지금 거지꼴로 살고 있을 거야. 내 덕에 고마운 줄이나 알아. 덕분에 편하게 잘 살았으면서 호강에 겨워 요강에 받쳤어, 아주.
-그냥, 살던 대로 살아요. 남남으로.
-윤경아, 너 엄마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윤경은 자리에서 일어서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 엄마 죽었다고 생각한 지 오래야. 엄마도 나 죽었다고 생각해요.
돌아서는 윤경을 엄마가 붙들었다.
-니 마음 모르는 거 아냐. 근데, 나도 힘들었어. 어떻게든 너 잘 살게 해 주려고 그런 거야.
윤경이 엄마를 거칠게 뿌리쳤다.
-나 잘살게 해 주려고?
기괴하리만큼 날카로운 윤경의 기막혀하는 웃음소리가 어두운 로비 복도에 울릴 정도로 크게 터져 나왔다. 짧은 웃음을 거두고 섬뜩하니 엄마를 쏘아보는 윤경의 눈빛에 살기마저 감돌았다.
-아저씨가 나를 만질 때 난 죽은 거야. 그때 엄마는 아빠 죽인 것도 모자라 나도 죽였어. 죽은 딸 손주를 무슨 수로 키워. 그만 가요.
엄마가 흡 울음을 터뜨리며 휘청 벽에 기대었다. 엄마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이 윤경의 눈에도 보였다.
ㅡ모..몰랐어...엄마는 몰랐다...
-몰랐다는 걸로 용서가 된다고 생각해.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윤경 앞에 머리를 조아리듯 엎드려 흐느꼈다.
-정말 몰랐어.... 알았다면...
-아니, 엄마는 알았어. 나를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갈 때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아빠가 암에 걸린 것도, 그렇게 죽어버릴 것도,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질 거라는 것도....
나를 낳아준 아빠를 그렇게 처참하게 버리고, 어제까지 아빠 옆에 있던 엄마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고, 그 남자가 내 아빠가 되고, 그 아빠가 나를 만지고...
윤경은 울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눈에 핏발이 선명했다.
-엄마가 다 죽인 거야. 나도 아빠도.
-윤경아...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엄마를 내려다보는 윤경은 차고 건조했다.
-인생의 첫 경험을 의붓 아빠랑 했어. 엄만 이런 내가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무나 상관없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필요한 걸 주기만 하면 돼. 이거 하나 배웠네. 엄마한테. 제대로 배운 거야. 미안할 거 없으니까, 그냥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요.
윤경은 그날 밤 엄마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해나의 손을 잡고 재민이가 병실에 들어섰다. 아이는 윤경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윤경이 팔을 벌리자 아이는 해나의 손을 놓고 쪼르르 윤경에게 달려갔다. 윤경은 미소를 지으며 재민이를 안아 올렸다.
-재민이 잘 지냈어?
자신에게 안긴 아이가 작은 팔을 둘러 목에 착 감기자 윤경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하다가 이내 아이의 머리꼭지에 코를 묻고 마주 꼬옥 안아주었다. 그때, 해나의 뒤에서 지란이 안녕.. 손짓을 하며 멋쩍게 나와 섰다. 윤경의 표정에 살짝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지만 이내 샐쭉한 표정이 되어 해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민이 봐주느라 힘들었지. 고마워. 이 은혜를 어찌 갚니.
-은혜는 무슨, 재민이 순하던데? 하나도 안 힘들었어.
대화를 나누는 해나와 윤경 뒤로 멀찍이 섰던 지란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재민에게 내밀었다.
-우리 재민이 이거 좋아해? 우와!!! 이거 봐라. 멋지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한 지란의 과장된 호들갑 위로, 로봇 장난감을 보고 신이 난 아이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어색하던 병실 분위기가 조금쯤은 부드러워졌다.
해나가 장난감에 정신이 팔린 재민이를 안고 병실을 나간 후,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떨군 윤경의 옆에 지란이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아기는.. 괜찮은 거지?
-응, 다행히 위험할 뻔했는데. 이번엔 넘겼데.
지란이 안도와 미안함으로 얼룩진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내가, 말이 심했어. 감정이 격해져서 선을 넘었어.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데, 할 말 안 할 말 못 가렸어. 미안해.
-....
-만약, 아기가 잘못됐으면, 나 스스로 영영 용서 못했을 거야.... 아무 일 없어서 아기도 너도 고맙다. 다행이야.
-뭐 하러 굳이 병원엘 오고 그래. 이제 괜찮아.
-왜 미리 얘기 안 해줬어? 임신한 거..
-그날 말하려 했어.
-아.. 그랬구나.. 미안...
윤경의 시선이 비로소 지란을 향했다.
-아기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더 무섭드라. 비로소 실감이 난달까. 임신한 거 알고서도 한동안은 별 생각이 없었거든.
-너 임신한 거 알았으면 나, 그렇게까지 후벼 파진 않았을 거야. 좀 조심했을 텐데. 진짜 미안하다. 내가 좀... 뇌에서 입까지 필터가 없잖아. 미안해 윤경아.
윤경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지란의 손을 잡았다.
-지란아.
지란은 윤경의 너무 차가워서 놀라며 그 손을 감싸듯 마주 잡았다.
-나는.. 자신이 없어.
-뭐가? 아이 얘기야?
윤경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고,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가 뭔데, 인생은 맨날 좋기만 해야 하냐고.. 지난번에 니가 그랬지. 맨날 좋기만 한 건 아니었어. 아빠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매일매일 집안은 지옥이었어. 엄마, 아빠는 매일 싸우고, 아빠한테 투자했던 사람들 아침마다 몰려들어 문을 두드리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딱지들이 집안 물건들 곳곳에 붙고.... 우리 살던 집에선 진즉 나왔어, 너희에겐 얘기 안 했었지만...
윤경이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의 화장실 정도의 크기였다. 주방과 거실이 구분되지 않고 화장실은 현관문 바깥에 있었다. 반지하방에는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았고, 군데군데 천정과 벽에 검은곰팡이가 노파의 손등의 검버섯처럼 돋아있었다. 윤경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엄마 옆에서 교복을 입고 아침을 굶은 채 등교하고, 이불을 쓰고 울고 있는 엄마 옆에서 교복을 벗고 늦은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
어느 날 아침, 이불을 걷어 멍하니 앉아있는 엄마 옆에서 교복을 입고 등교했던 윤경이 집에 돌아왔을 때, 한켠으로 개어져 있는 이불 옆에 엄마는.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엄마를 보지 못했어. 그리고 얼마 후에... 반드시 해결할 테니 나만 믿으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집을 나갔던 아빠가 벗어놓은 구두로 돌아왔어. 나는.. 나중에 알았어. 그때 아빠가 많이 아프기까지 했다는 걸. 장례식 마치고 엄마가 왔어...
윤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날이... 그날이야 내가 너희 집에 가서 며칠만 있게 해달라고 했던.
-응, 기억나. 몰랐어.. 이사 간 것도. 너희 엄마가 나갔었다는 것도...
윤경이 큭 웃었다.
-야, 내가 말을 안 하는데 니가 어떻게 알아... 너희 집에 있는 동안, 엄마가 학교로 몇 번 찾아왔어. 너희 집에 있다고 말 안 했거든. 절대로 엄마한테는 안 간다고... 친구네 집에 있다가 차라리 청소년 쉼터 같은 데 가서 지내겠다고 신경 끄라고 모질게 말했어.
지란은 모르고 있던 윤경의 시간이었다.
-우리 집에 그렇게 오래 안 있었잖아. 어디서 지냈어 그 후엔?
-아빠도 없는 반지하방으로 다시 갔지. 아빠 살아계실 때는 그렇게 자주 왕래하던 친척들 아무도 연락도 안되고, 아빠 친구라던 사람들은 날 보고 화만 내고... 갈 데가 어딨어.
그리고 얼마 뒤에 엄마가 다시 나를 데리러 왔드라? 그리고 나를 어디로 데려갔는데 이전 내방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해가 들어오는 방이라... 좋았어.
원래 내 방보다 훨씬 작지만 적어도 바퀴벌레 나오고 곰팡이 가득한 지하방에서 올라와서, 여름에도 보송하고 쾌적하고 전처럼 학원도 다닐 수 있고... 아빠 없는 그 방으로 다시 혼자 가긴 죽기보다 싫어서 엄마가 일하는 거 모른 척했어. 보험회사 다닌다고 하지만 실은 보험실적으로 돈 버는 거 아닌 거 알면서도 엄마 일 응원한다고.. 그랬지. 어쩌면 믿고 싶었나 봐 엄마가 진짜 보험왕이라고.
담담하게 이어가던 윤경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새아빠가 생겼어. 어렸어도 알겠더라. 아빠 장례 치른 지 세 달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랑 그럴 수가 있어. 나중에 알았지만 아빠 사업 어려워지기 시작하고 엄만 이미 진즉 갈아탈 준비했을 거야.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윤경의 귀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를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어. 그 눅눅한 방에서...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너에게 되찾아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엄마도 벗어나고 싶었겠지... 견딜 힘이 없었을 테니까.
윤경이 엄마에게 대답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웃기지 않니. 그런 엄마를 경멸했는데 그런 내가 엄마한테 제일 잘 배웠어. 어떻게 하는 건지. 그 남자한테 그러고 나선. 누구 하고도 상관없어졌어.
윤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엄마가 알고 있었다곤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살 수가 없었거든.. 일부러 나를 세뇌시켰어. 엄마는 몰랐다고. 몰랐을 거라고..
왜 너의 생은 내내 쾌적해야만 하냐고 물었지. 실은 어린 시절 잠시를 제외하고는 늘 불쾌하고 끈적거렸어. 기분 드럽고 거지 같고..
엄만, 나를 눅눅하지 않게 해 주었지만, 차라리 그걸 견디는 힘을 길러주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해. 엄마니까.. 근데 그러기엔 우리 엄마 본인이 그걸 견딜 힘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랬을 거야. 엄만 그때 지금 나보다도 어렸으니까... 엄마였으니까.
그걸 배우지 못한 난... 그래도 나는 엄마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어. 결혼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의 법적인 아내가 되는 거니까 그게 나빠? 그럼 괜찮은 거잖아? 했지.. 나 진짜 웃기지 않니.
지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너를 나쁘다고 할 자격은 없어. 다른 이의 시간을 모르는 사람은 누구나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너만 아는 거니까. 함부로 말해서 미안하다.
그때, 재민을 안은 해나가 다급히 병실로 들어섰다.
-TV 좀 켜봐. 윤경아, 너 병원에 있는 동안 안원장하고 연락 안 했어?
화면 속에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몰려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형사처럼 보이는 두 남자에게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막혀 잠시 멈췄던 일행이 다시 발걸음을 떼었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조금 들었다. 수염이 꺼칠해진 안원장이었다.
놀라는 지란과 윤경 위로 해나가 설명했다.
-재민이 돌보는 동안, 안원장 한 번도 집에 안 들어오길래. 나는 니가 얘기해서 나 때문에 피해있는 줄만 알았어. 그런데, 어제 이모님한테 들으니 병원에도 안 나온 지 며칠 되었다는 거야. 너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윤경은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늘 빈틈없던 남편의 초췌하고 흐트러진 모습이 뉴스가 아닌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어 보였다.
재민이를 돌보기 위해 윤경의 집을 오가느라 분주하던 해나는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넘어 있었다. 해나는 오늘만큼은 진석이 꼭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석이 벽에 던져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푸른 꽃무늬의 컵이 있던 자리에 해나는 진석과의 커플 반지를 빼서 올려두었다. 벌써 진석이 집을 나간 지 3주가 지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를 지란에게 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중, 삑삑.. 삑... 현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진석이 들어왔다. 출퇴근용 양복 차림이었지만, 바지는 그동안 한 번도 다림질을 하지 않은 듯 온통 주름투성이고, 넥타이를 생략한 후줄근한 셔츠는 단추가 풀려 단정치 못하게 벌어져 있었다. 늘 깔끔하던 모습과 달리 머리와 수염을 정돈하는 것도 잊은 듯한 진석은 그새 살이 많이 빠진 듯, 눈이 퀭해 보이고 볼이 꺼져 있었다.
-왔어?
해나는 마치 아침에 나갔던 사람이 저녁에 집에 들어왔을 때 맞이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해나가 너무 조용히 자신을 맞이하자 오히려 겸연쩍어진 건 진석이었다.
-해나야...
-다행이다.
-응?
진석은 해나의 그 ‘다행이다’를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주어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이해한 듯했다. 해나의 걱정이 자신의 등장과 함께 안심으로 바뀌고, 어쩌면 용서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고 기대하게 만든 것일까. 주춤거리던 진석이 다소 밝아진 얼굴로 해나가 책을 읽고 있는 침대 곁에 앉았다.
-오늘 돌아와서 다행이야. 잘했어.
-해나야, 내가...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어. 너랑 떨어져 있는 동안 확실히 알았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 없으면 나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 정말 그래...
해나의 손에서 책을 부드럽게 빼앗아 내려놓은 진석은 해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결혼 말인데... 내가 생각해 봤거든.
해나가 진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석이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해나의 시선은 컵이 놓였던 자리에 둔 반지 쪽으로 향했다.
16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