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대신 통속소설
취향의 발견
16
재민이를 돌보기 위해 윤경의 집을 오가느라 분주하던 해나는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넘어 있었다. 해나는 오늘만큼은 진석이 꼭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기 전에 진석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다. 진석이 벽에 던져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푸른 꽃무늬의 컵이 있던 자리에 해나는 진석과의 커플 반지를 빼서 올려두었다. 벌써 진석이 집을 나간 지 3주가 지나고 있었다.
깨지지 않은 나머지 하나를 지란에게 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중, 삑삑.. 삑... 현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진석이 들어왔다. 출퇴근용 양복 차림이었지만, 바지는 그동안 한 번도 다림질을 하지 않은 듯 온통 주름투성이고, 넥타이를 생략한 후줄근한 셔츠는 단추가 풀려 단정치 못하게 벌어져 있었다. 늘 깔끔하던 모습과 달리 머리와 수염을 정돈하는 것도 잊은 듯한 진석은 그새 살이 많이 빠진 듯, 눈이 퀭해 보이고 볼이 푹 꺼져 있었다.
-왔어?
해나는 마치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귀가하는 일상인 듯 무심하게 말했다. 해나의 평온에 오히려 겸연쩍어진 건 진석이었다.
-해나야... 잘... 지냈어?
-다행이다.
-응?
진석은 해나의 그 ‘다행이다’를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주어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이해한 듯했다. 해나의 걱정이 자신의 등장과 함께 안심으로 바뀌고, 어쩌면 용서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고 기대하게 만든 것일까. 주춤거리던 진석이 다소 밝아진 얼굴로 해나가 책을 읽고 있는 침대 곁에 앉았다.
-너무 늦기 전에 돌아와서 다행이야.
-해나야, 내가...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어. 너랑 떨어져 있는 동안 확실히 알았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 없으면 나 정말 엉망이더라.
해나가 들고 있던 책을 부드럽게 빼앗아 내려놓은 진석이 해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결혼 말인데... 내가 생각해 봤거든.
해나가 진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석은 이내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해나와 눈을 맞추었지만, 해나의 시선은 진석의 눈을 피해 컵이 놓였던 자리에 둔 반지 쪽으로 향했다.
해나는 진석의 다음 말을 듣지 않고 진석에게 잡힌 손을 빼내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결혼 얘기는 잊어.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딱 일 년만 더 기다려주면 내가..
-기다릴 거 없어. 우리 헤어지자. 아니 이미 헤어진 건가.
-화나서 그러는 거 알아. 너 화 풀릴 때까지 내가 기다릴게. 뭐든 할게.
-아니,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난 이미 정리 끝났어.
-난 아니야. 너 혼자 정리 끝났다고 하면 그냥 끝인 거야? 나한테도 기회를 좀 줘야 할 거 아냐.
해나가 웃었다. 해나의 그 웃음소리는 무섭도록 차분하고 차가웠다. 진석이 보지 못한 해나의 모습이었다.
-기회... 너와 내가 만나는 7년간 매일 매 순간이 너에게는 기회였어.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반은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내가 겁이 많아서, 두려워서, 혹은 비겁해서 너에게 기회를 너무 많이 준 책임. 그러니까 나는 내 잘못에 책임을 질 거야. 너도 그렇게 해.
-차라리 화를 내. 소리를 지르던가 분이 풀릴 때까지 날 때려.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니.
-화? 나 화 안 났어. 화를 왜 내. 감정이 남아있어야 화도 나는 거야. 우리가 같이 한 시간이, 세월이 짧지 않았고, 좋았던 시간도 많았던 만큼, 마지막이 이래서 좀 슬프다. 그래도 다행이야. 얼굴 보고 작별 인사 할 수 있어서.
해나는 식탁 위에 두었던 계약서를 진석에게 건넸다.
-이 집, 오늘 계약 만료이고 다음 세입자 이번 주말에 이사 들어와. 내 짐은 대강 정리했고 진석 씨 물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뒀어. 가구 같은 건 다음 들어올 분이 그냥 다 쓰는 조건이라서 진석 씨가 내일까지 안 오면 어쩔 수 없이 물건들은 그냥 다 청소업체 불러서 치워달라고 했어.
-야, 송해나. 너 진짜 이렇게 끝낼 거야? 너, 나하고 같이 한 세월이 7년이야. 이렇게 헤어지자고? 하룻밤 사이에?
-하룻밤 사이가 아니야. 나한텐 충분했어. 헤어질 시간. 나한테 그랬지. 자긴 참 취향이 확실하다고. 내 취향은 실은 내 거 아니라 진석 씨 거드라. 7년 동안 진석 씨가 좋다고 한 샴푸향, 비누향, 샤워젤. 섬유 유연제까지 그렇게 선택하다 보니 그게 내 취향 같이 되어 버렸어.
-거봐, 오랜 연인은 그런 거야. 같은 향처럼 지겨워질 수 있어. 그치만, 우리 다 바꾸고 새로 시작하자. 응? 내가 잘할게. 해나야.
-같은 향이 지겨운 게 아니라 내가 지겨워진 거겠지. 그리고 난 더 이상 너에게 맞추고 싶은 생각이 없어.
진석이 해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해나야?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너한테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올 수가 없었어.
-그래? 그나마 있던 돈까지 다 날렸나 보지. 이렇게 온 걸 보니?
-결혼 자금은.. 정말 미안하다. 더 크게 불려서 널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했던 거야. 모르겠어?
해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 몇 가지 물건들을 챙겨 넣은 가방을 꺼냈다.
-다음 주면 비워야 하는 집이니 며칠 지내면서 짐 정리나 해. 나는 나가 있을게.
-여기 계약 만료면 넌 어디로 가는데? 나는 어떡해 그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진짜 잘못했어. 응?
-응. 너 잘못했어. 알아. 반성하고 벌 받아. 어떤 벌을 받게 될 진 나도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무지하게 쎈 벌이면 좋겠다.
돌아서는 해나의 뒤에서 진석이 벽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욕설을 들으며,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깨끗하게 정리해 주는 진석의 마지막 선물 같은 거라고. 해나는 쓰게 웃었다.
집을 나온 해나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윤경의 집으로 향했다. 안원장의 병원에서 연예인들과 유명 인사들에게 불법 마약류인 프로포폴을 상습 처방하고 투약한 혐의가 포착되어 안원장은 검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윤경은 제법 씩씩하게 버티고 있는 듯 보였지만 안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고위험군 산모였다. 홀몸도 아닌데 재민이까지 돌봐야 하는 윤경이 걱정된 해나는 퇴원한 이후로도 자주 그녀의 집에 머물며 친정엄마처럼 살뜰히 돌봐주었다.
-좀 쉬다 오라니까 나 이제 괜찮아. 재민이 나 혼자 봐도 돼.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재민이가 조르르 해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다시 온 해나가 반가우면서도 미안해하는 윤경을 보고 해나가 오히려 멋쩍어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오늘은 니가 나 좀 도와주라. 진석이가 왔는데, 내가 갈 데가 없네.
-어이구.. 그 웬수는 끝까지 도움이 안 된다. 증말. 거봐 내가 뭐라고 했...
말하다 말고 윤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누구한테 잔소리를 하니 지금. 흐흐 어이없어. 얼른 들어와!! 기집애야. 지지리 박복한 것... 으이그...
오전부터 쏟아지는 비에 하늘마저 낮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납골당의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해가 들지 않아 어둑한 안치단 사이로 흰 국화꽃다발을 든 이수가 느리게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를 모신 안치단을 지나 그가 멈춰 선 곳은 한 소녀의 납골함 앞이었다. 하얀 항아리 주위로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의 어린 소녀는 점점 어른이 되어갔다. 마지막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이수가 너무나 잘 아는, 그가 사랑한 미소였다. 이수의 시선이 어린 지교의 사진에 머물렀다. 눈물이 차올라 흐릿해진 사진 위로 장례식장의 영정사진이 겹쳐 보였다.
중앙선을 침범한 승용차와 버스가 추돌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34명의 학생들 중 3명이 죽고, 승용차 운전기사를 비롯한 19명이 중상을 입은 큰 사고였다. 버스 운전기사였던 이수의 아버지는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중앙선을 침범한 상대방의 과실이 인정되었으나, 추가로 제출된 증거 자료인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이 문제가 되었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 시각 전화를 한 건 이수였다. 아빠는 이수에게 ‘지금 운전 중이니 나중에 통화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 일’이 이수 아버지를 ‘운전 중 부주의로 3명의 아이를 죽이고 18명의 아이를 다치게 한 살인자’로 만들었다.
합동 장례식장은 갑자기 당한 불운에 몸부리 치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로 가득 찼다. 아직 퇴원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부러진 팔과 다리로 기어와 영정 사진 앞에 무릎을 꿇은 아버지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자기가 운전하던 차에서 애가 죽었는데. 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 오길. 불쌍한 애들 여럿 죽여놓고 본인은 멀쩡하구만.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졸음운전이었다고 하는 거 같던데요?
-아냐. 운전 중에 휴대폰을 보고 통화까지 했대.
-앞으로 저 애들 부모들은 다 어떻게 살라고. 천하에 죽일 놈, 천벌 받을 놈.
아버지를 악마 취급하며 수군대는 사람들 속에 이수도 서 있었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린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죽은 아이의 엄마인 듯한 한 여자가 뛰어나와 이수의 아버지에게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며 악을 썼다. 그 여자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뒤따라 나와 여자를 말렸다. 여자가 발길질과 주먹질을 번갈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머리를 땅에 박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고스란히 그걸 온몸으로 받아냈다.
사지를 비틀며 통곡하다가 허리가 꺾인 채 남편의 손에 부축되어 나가는 여자 뒤에 한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이수는 그 여자 아이의 얼굴이 사진 속의 아이와 같은 얼굴임을 알아보았다. 두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사진 속 아이와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울지 마’라고 해야 할지.
실체가 없는 소문이 멋대로 뿌리를 뻗어나가는 동안 아버지 역시 피해자임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앙선을 침범한 운전자를 피할 수 없었다는 아버지의 증언도, ‘나중에 통화하자.’ 한마디만 남기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는 이수의 말도 죽은 아이들 앞에선 아무 소용없는 변명일 뿐이었다.
시험을 잘 봤으니 약속대로 축구공을 사달라고, 아빠한테 빨리 자랑하고 싶어서 했던 전화 한 통이 가족의 생을 송두리째 앗아가게 될 줄은 어린 이수는 꿈에도 몰랐다. 어디에서도 다시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이수의 아버지는 술로 날을 지새우다가 그해 연말에 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술을 마셔서 발을 헛디딘 게 아니라, 헛딛으려고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맨 정신으로도 건너기 위험한 그 가파른 다리 위를 걸었을 리가 없다고. 이수는 매일 생각했다. 내가 그때 그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아무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고, 아빠도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끊임없는 후회와 죄책감이 날마다 이수를 짓눌렀다.
그날의 그 사고와 함께 무너진 건 지란 뿐만이 아니었다. 운명의 밧줄에 같이 묶인 두 개의 돌멩이처럼 두 아이는 그 사건으로 인해 함께 심연으로 딸려 들어가 어두운 바닥에 고인 시간을 따로, 또 같이 겪었다.
이야기를 마친 이수가 슬프게 물었다.
-그 사고는, 우리 가족도 죽였어.... 이것도 이유가 될까요.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그날, 장례식장에서 우리 엄마도 그 일이 너희 아버지 잘못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 거야. 엄만... 그때 누구라도 원망하고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 테니까. 엄마도 나도 어제까지 함께 있던 지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오래도록 아니 지금도. 당신의 죄책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지도.
-이수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어. 너 때문이 아니야.
-장례식장에서 맞고 있는 아빠를 보면서 사진 속 그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하면서도, 그 아이의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그날 사진 속 아이와 똑같이 생긴 여자애를 봤어요. 울고 있던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가 만난 게 그때가 처음이었네요.
지란의 기억 속에 그날 저항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채 엄마의 발길질을 견디던 남자가 떠올랐다. 울부짖으며 아빠에게 부축되어 나가던 엄마의 모습도. 엄마가 떠난 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그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어린 소년이 엎드린 남자에게 목발을 건네고 부축해 나갔었다. 그날 그 소년과 눈이 마주쳤던가.. 지란은 그날의 이수가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이수와의 인연이 그날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란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는 거야.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 니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야.
지란은 흐느껴 우는 이수를 안았다. 키가 큰 이수가 지란에게 안겨 아이처럼 흐느꼈다. 지란은 이수의 어깨를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지교의 사진 앞에서 그때의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안고 도닥이고 있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안치단 안으로 햇살이 비쳐 들었다.
구름 수면등이 켜진 재민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윤경이 살짝 책을 내려놓았다. 어깨에 기대어 있던 재민이는 어느새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윤경은 잠든 아이를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살짝 쓸어주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이가 깰세라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온 윤경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어 소파에 앉은 해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윤경이 맥주를 해나에게 내밀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최대한 시원하고 맛있는 표정으로 마셔주라. 대리만족이라도 하게.
해나는 이제는 제법 불룩해진 윤경의 배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콩아, 얼른 나와라. 느이 엄마 이제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 같다.
-우리... 지란이도 부를까??
-좋지. 오랜만에 셋이 한 잔 하자.
전에 살던 집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윤경의 거실은 재민이의 장난감과 책들, 이제 태어날 아기를 위한 젖병, 아기 모빌, 아기 바운서 등으로 가득했다. 거실 코너의 서랍장에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배내옷과 손싸개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고, 탁자 위에 놓인 만삭 사진 속 윤경은 심플한 검은 드레스에 대문자 D자형의 배를 한껏 드러내고, 그런 그녀의 목 뒤를 꼭 껴안고 있는 재민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지란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덮어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재민이랑 콩이 둘 다 너 혼자 키우겠다고? 너 대책은 있는 거야? 이 집은 또 어떻게 된 거고?
윤경은 맥주잔에 담은 보리차를 홀짝이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안원장이 이 여자랑 호텔 들어가는 거, 그 여자랑 모텔 들어가는 거, 저 여자랑 차에서, 병원에서 그 짓 하는 거 등등, 사진 찍어두고, 간호사들 내 편 만들어 증언 확보해 녹음해 두고 들이밀었어. 상습적인 혼외정사는 백 프로 귀책사유이자 이혼 요구 사유가 될 수 있으니, 망신당해 시끄러워지지 않고 싶으면 세 가지 들어 달라 했지.
-세 가지 소원? 뭐야 램프의 요정 지니야?
윤경이 우아하게 치즈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강남 아파트 명의 하나, 상가 명의 하나. 신혼 초였지 아마? 계약서 쓰고 바로 명의 이전해 내 이름으로 등기 확인하고.. 미리 해놓길 잘했지 뭐니. 그 사람 그렇게 대책 없이 망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럼, 나머지 하나는?
-아, 그건 그때 니들도 봤던 그 차. 기억나지? 신차 계약해 나온 날 제일 처음 타고 간 게 그때 해나 일하던 백화점이었나 보다. 그건 지금도 잘 타고 다니고 있지.
해나와 윤경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해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됐... 아니..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암튼 다행이야. 혼자 아이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근데, 너 참 대단하다.
윤경은 여전히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지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얘들아? 세상에 공짜 없다. 이 학벌, 이 미모에 ‘취업’ 대신 택한 ‘취집’인데 이 정도 전략 실천의 노력은 해야지. 먹고 사는 일이 장난인 줄 알아?
지란이 윤경을 향해 브라보~ 박수를 치곤 양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거봐, 내 뭐랬니. 역시! 난 년이야.
지란이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정윤경 여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해나와 윤경이 잔을 부딪히고, 오랜만에 세 사람은 옛날로 돌아간 듯 함께 웃었다. 윤경은 배를 톡톡 두드리며 지란과 해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이제 요 녀석까지 책임져야 할 입이 두 개인데, 나도 일해야지. 뭐 좋은 생각 없어 니들?
해나는 아기가 어릴 때는 일하기 힘들 텐데 어떡하냐고 걱정스러워했다. 지란이 미간을 찌뿌려 주름을 만들며 눈을 가늘게 뜨곤 심각한 척 중얼거렸다.
-음... 이번에는 돌싱에 두 아이 양육 조건이면... 추가 금액으로도 안 될라나? 힘들겠지?
-지랄하네.
윤경이 지란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하자 지란은 얼른 윤경의 배에 양손을 대고 말했다.
-콩이야 귀 막아.. 엄마가 나쁜 말 하는 거 듣지 말자.
윤경이 어이없어하며 웃고, 지란은 그런 윤경의 배 위에 계속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
-걱정 마. 이 이모들이 너 하나 못 먹이겠어?
지란이 다정한 눈빛으로 윤경을 바라보았다.
-같이 생각해 보자. 일단 너는 아무 걱정 말고 아기나 건강하게 낳을 생각이나 해.
따스한 불빛이 비치는 식탁 아래 세 여자들의 시간이 무르익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처음 만났을 때의 소녀들이 아니었다. 사랑을 믿었던 여자와, 사랑 따윈 없다고 생각했던 여자, 그리고 사랑이 두려웠던 그녀들은 서툴고 어리석었지만 뜨겁고 치열했던 각자의 이야기 속 시간들을 기꺼이 겪어내고 견디며 어른이 되었다.
해나는 자신이 사랑이라고 잘못 믿고 있던 것에서 놓여나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윤경은 남녀 간의 사랑 대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책임지는 것이 진짜 사랑임을, 지란은 서로의 아픔을 감싸 안으며 상실의 두려움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질주하기 시작하자 해나는 눈을 꼭 감았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가 덜컹 소리와 함께 몸이 부웅 뜨는 느낌이 나고, 귀가 꽉 막힌 듯 먹먹해지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번갈아 꾹꾹 누르고 있는데 누군가 해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눈을 떠보니 눈매가 서글서글한 옆 좌석의 남자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입을 꾹 닫은 채 양 볼을 부풀려 바람을 넣은 얼굴을 하고 해나를 보고 있었다. 해나는 낯선 이의 이상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비행기 엔진소리 때문에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니 따라 해 보라는 뜻 같았다. 해나는 남자를 마주 보고 똑같이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볼에 바람을 넣었다. 귓속에서 찌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막혔던 귀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거 봐 내 말이 맞죠?’ 하듯 싱긋 웃었다. 요동치던 비행기의 진동이 점차 가라앉으며 딩... 안내음이 울리고 ‘방금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졌습니다.’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해나는 비로소 긴장이 풀어지며 어깨에 힘이 풀리고 편히 숨이 쉬어졌다.
-Thank you.
해나가 고개를 까닥 숙이며 옆의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자 남자는 예의 바른 미소로 마주 목례했다.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와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었다.
-파리는 처음인가요?
남자가 서툰 한국어로 물었다. 해나는 남자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남자의 발음이 꽤 정확하다는 것에 놀랐다.
-네.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남자는 칭찬받아 기쁜 아이 같은 얼굴을 하며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왜? 그곳에 가요?
정확히 구사할 수 있도록 연습한 문장이 몇 개 안 되는 듯, 남자는 이번에는 완연한 외국인의 서툰 억양으로 천천히 물었다. 해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뭘... 좀 찾으러요.
-찾으러? 무엇을? 사람? 파리에 있는... 거?
해나는 초록 눈의 그 잘생긴 청년에게도, 혹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답을 했다.
-나... 나를 찾으러 가요. 그리고 내 취향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남자를 마주 보는 해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하얀 구름밭 사이로 햇살이 빗살무늬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해나의 가슴이 설레임으로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끝-
* 사진출처 : Unsplash의Paul Steiner
P.S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고 겁도 없이 시작한 소설이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분량의 조절도, 톤의 조절도 안되고, 지나치게 대사 위주여서 이런 것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고민이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어떻게든 이 소설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꾸역꾸역 써나갔습니다.
어느 순간, 해나와 윤경과 지란은 제가 만든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끼리 살아 숨쉬어 제가 몰래 숨어 그녀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소설처럼, 많이 부족하고 어리고 때로는 어리석은 그녀들이었지만, 제가 이 소설을 끝내려 아등바등 하는 동안 저도, 그녀들도 각자의 시간 속에서 성숙하고 성장한 듯 합니다.
서로 간의 신뢰와 사랑이 아니라, 학벌과 경제력이 결혼의 조건이 되어, 상호간에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결혼 계약서에 공증받아 식장에 들어가는 현실에서 그래도 여전히 사랑의 가치를 믿는 여자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비록 소설 속의 이야기 일지라도 어딘가에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소설을 통해 제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진심이기도 합니다.
서툰 글에 관심가지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작가님들이 글로써 반짝반짝 빛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