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노래

by 이제이

“봄날은 가고, 노래는 남는다.
그날, 아버지의 노래가 우리 모두의 눈물이 되었다

2013년 1월 21일 새벽 1시 3분.
영원한 쉼 속으로 할머니를 보내드린 날.
그해 가을,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를 모시고 처음으로 벌초를 나섰습니다.

장손 역할을 대신해주던 남편은 그날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섰습니다. 어린 막내 대신, 결혼 후부터 내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님처럼 살뜰히 챙기고, 기꺼이 발이 되어주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못내 미안해하시며, 깊이 아끼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는 그렇게 소소한 일들 속에서 가족이 되어갔습니다.

벌초를 향해 가는 길,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여기저기로 데려다 놓았고, 해가 서산머리 30센티쯤 남았을 때 비로소 묘역에 도착했습니다. 장시간 운전으로 지친 남편의 얼굴엔 지는 해처럼 붉은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다행히 미리 연락해둔 덕에 벌초는 되어 있었고, 멀리서 묫자리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이며 묘가 어른어른, 우렁우렁 떠다니는 듯한 기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땅바닥이 젖어드는 듯,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였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상을 차리기 시작했지요.

그때 아버지가 산소를 한 바퀴 휘 돌아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거기 말고 저 아래 묘부터 상 차려라.”
“할머니 산소에 안 차리고요?”
“증조부모 묘부터 해.”

딴딴한 목소리, 흔들림 없는 단호함.
우리는 말없이 증조할머니 두 분과 증조할아버지 묘에 먼저 상을 차렸습니다.
아버지는 당신 어머니께서 하시던 것을 보고 배우셨고, 그날 나는 또 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할머니 산소에 상을 차릴 때,
내 어깨는 멈추지 않고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절하는 내내, 산을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직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를 카시트에 앉히는 연습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신 할머니를 보러 가야 했거든요.

그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눈을 못 뜨고, 코로 음식을 드시던 할머니.
더는 가능하지 않겠구나 생각하던 그날, 중환자실 앞에서 다섯 자매는 아버지께 매달렸습니다.
“아빠, 우리 할머니 집에 모시자. 여기선 못 보내드려. 우리 그렇게 못 해요.”

그 말에 아버지는 결단을 내리셨고, 연명포기 서약서에 사인을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신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걷기 시작하셨고, 이후 3년을 더 사셨습니다.
우리 막내가 직장까지 그만두고 수발을 들었고, 엄마는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영면하시던 날,
모든 절차를 척척 해내시던 아버지.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압니다.
당신 마음에 담긴 수많은 생각과 감정, 그 모든 것들을…

그날,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묘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제가 드릴 건 없고 노래나 한 자락 불러드릴게요.”

그러시곤, 할머니가 살아 생전 흥얼거리시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그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목소리는 서럽게 떨렸고, 어깨는 흔들렸고, 그 가슴에서는 쓰나미 같은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울고 계셨습니다.
아니, 통곡하고 계셨습니다.
살아오며 처음 본, 아니 그 어떤 누구보다도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그건,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그리움의 원칙.
사랑과 애증이 얽힌, 남겨진 자의 무게였습니다.
홀로 63년, 자식을 남편 삼아 사신 어머니를 향한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몸은 산을 내려왔지만
마음은 아직 그 산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버지의 노래는 그렇게
그날,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여전히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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