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차 한 사발과 할머니에 대한 기억
대문을 살짝 열고 들어선 낯선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그… 물 한잔만 얻어마실 수 있을랑가요?”
할머니는 반가운 얼굴로 대답하신다.
“거 앙그씨요, 내 떠올랑께요.”
금세 부엌에서 시원한 보리차 한 사발을 떠오신 할머니와 낯선 아주머니 사이, 툇마루에서 대화가 이어진다.
“으디서 오셨써라?”
“완도서 왔소.”
“아따 나가 순천사람인디, 고향사람 봉께 겁나 반갑소.”
두 분은 처음 본 사이 같지 않게 금세 정이 붙는다.
“근디 뭣하다고 여그까지 오셨당가요?”
“나가 농사진 짐 팔러 안 댕기요.”
아주머니가 짐보따리를 가리키자, 할머니가 물으신다.
“저 거이 다 짐이당가?”
“야~ 맛 쪼가 보시씨요.”
김 한 톳 중 한 장을 쑥 뽑아 할머니께 건넨다.
할머니는 손으로 꾹꾹 접어 입속에 넣으시고, 우물우물 씹으며 감탄하신다.
“참말로 꼬숩고마~~”
아직 다 삼키기도 전에 궁금증이 밀려온 할머니가 다시 물으신다.
“이거이 파래짐이요, 돌짐이요?”
“돌짐이여. 여그 짐 보따리에 파래짐도 있고 재래짐도 있고 다 들었써라.”
“아따~~ 그려? 오메 이 더운디 다 질머지고 다닌다고 고생했쌌소. 나가 쪼까 팔아줄랑께 싸게 잔 주씨요.”
“파래짐은 한 톳에 월매 나요?”
“이천 원 인디, 천오백 원만 주씨요.”
“나가 한 톳만 사간디, 나가 이 동네 큰손할매여. 우리 아들이 여그서 큰 공장 한당께.”
“공장 아가씨들 밥 해주는 식당서 쓸 꺼잉께 싹 다 해서 천 원씩에 줄라믄 놓고 가고, 아니믄 걍 가꼬 가씨오.”
“오메 오메, 이거슬 다 산다고라? 오메 참말로 나가 오늘 운수가 대통인갑소, 참말로~~”
그렇게 아주머니는 가지고 온 김을 몽땅 우리 집에 다 팔고 가셨다.
가시기 전,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맹년에 또 오께라~~”
나는 그날 여섯 살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고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 대화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산 김은 곤로불 위 석쇠에 한 장, 한 장 굽혀지고
100장도 넘을 듯한 김들이 그릇에 수북이 쌓였고
장독대 옆에서는 고춧가루와 깻가루, 찹쌀풀이 바른 김부각이 바삭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사람을 반기고, 돕고, 웃으며 사셨다.
그 작은 한 장의 김, 그 사발의 보리차에 담긴 마음은
살면서 점점 더 크게, 더 깊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할머니. 하루도 잊지 않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그 희생과 베푸신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고,
저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할머니, 너무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