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창의 아이

by 이제이

나는 여섯 살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날 아침, 평소처럼 나가셨던 엄마는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도, 그다음 해도...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너는 이제 아빠랑만 살아야 해.”
그 말은 어린 내게, 가위처럼 가슴을 잘라냈다.

시간이 흘러 아빠는 새어머니를 집에 들였다. ‘엄마’라는 단어를 다시 불러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는 내가 알던 따뜻한 품의 여인이 아니었다.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그녀는 내 마음속 상처를 어루만질 줄 몰랐다. 아니, 아예 보려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원래 좀 그래. 울지 마, 시끄러워.”
그녀의 무심한 말은 아이의 마음을 꾹꾹 짓눌렀고, 결국 나는 폭발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경찰서라는 공간에 익숙해졌다.
지우개 하나 훔치는 것으로 시작된 일탈은 오토바이를 훔쳐 달리는 비행으로 커졌고,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밤을 새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선생님들의 훈계는 들리지 않았고, 친구들의 말도 공허했다. 그저 누군가 내게 “괜찮아, 너는 사랑받아야 할 아이야.”라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그날도 음악 시간은 그저 점수 채우는 휴식 시간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교실을 채운 멜로디가 내 마음을 멈춰 세웠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첫 음이 흐르는 순간,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무너진 내 감정의 둑을 건드렸다.
왜였을까. 그 음악은 울지 못했던 나를 울게 만들었다.
말하지 못했던 슬픔, 들키기 싫었던 외로움, 숨기려 했던 그리움… 모두가 그 선율에 담겨 있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고도 나는 교실을 나가지 못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가슴이 먹먹했고, 귀가 간질거렸다.
그날 이후, 나는 음악실 앞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손끝에서 울리는 소리가 마음의 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동네 피아노 학원을 찾아갔다. 낡은 간판과 오래된 건물, 하지만 안에는 고요하고 맑은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수업받으러 왔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중년의 여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돈은 없어요. 그냥… 한 번만 쳐보고 싶어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앉아봐.”

나는 그렇게 인생의 첫 건반을 눌렀다.
손은 서툴렀고, 박자는 엉망이었지만, 마음만은 분명했다.
그날 이후, 원장님은 나를 위해 저녁 수업이 끝난 뒤 학원을 열어주셨다.
그녀는 내게 교사이자 엄마였고, 음악은 나의 언어이자 쉼터였다.

친구들이 피시방에서 스타크래프트에 열중할 때, 나는 싸구려 헤드폰을 끼고 라흐마니노프와 쇼팽을 들었다.
클래식 음악은 내게 복잡한 세상과 감정을 정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건반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작은 구원이 되었다.

음악실의 낡은 피아노로 연습을 이어가며, 나는 전국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했다.
생애 첫 수상. 상장의 내 이름을 보고 원장님이 눈물을 흘리셨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나는 지방 국립대 음대에 진학했다.
피아노과. 입학은 어렵지 않았다. 경쟁률은 낮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뜨거웠다.
1학년 말, 전액 성적장학금을 받으며 교수님의 추천으로 비엔나 국립음악대학의 단기 연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생애 처음 밟은 유럽 땅, 비엔나.
그곳은 음악이 숨 쉬는 도시였다. 베토벤이 걷던 골목을 걷고, 슈베르트가 연주하던 홀에 앉으며, 나는 다시 아이가 된 듯 설렜다.

이제는 내게도 제자가 있다.
나처럼 가정의 빈자리에 아파하고, 음악을 사랑하지만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작은 음악회를 열고, 무료 수업도 진행한다.
음악은 내게 꿈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그 꿈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삶은 여전히 어렵고, 때때로 가난은 내 어깨를 누른다.
하지만 음악이 있기에,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날 음악실에서 들었던 ‘비창’은
이제 내 인생의 서곡이었다는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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