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새장에 가두지 마

너로 살아도 괜찮아

by 이제이

아침부터 정신이 없어.
애 챙기고,
남편 출근 준비시키고,
설거지 좀 하다가
빨래 산처럼 쌓인 거 보고
그냥… 한숨이 나왔어.

오늘도 나라는 사람은
하루의 맨 끝에 있구나.
그 생각이 툭, 들더라.

엄마니까,
아내니까,
참아야지. 미뤄야지. 당연하지.
이게 사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

근데 말이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어디 있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라진 걸까?
사라졌나?
아니, 그냥…
스스로 잊어버린 건지도 몰라.


---

예전에 참 좋아하던 노래가 있었거든.
가사도 멜로디도
딱 나 같아서,
볼륨 크게 틀고 따라 불렀던 노래.

근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그 노래를
마트에서 나오다가
무심코 흥얼거렸어.

아무도 없는 길.
내 귀에만 들리는 그 노래.

그때 알았어.
아… 나, 아직 여기 있구나.

‘엄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닌,
그냥 내가.

잠깐 멈췄어.
쇼핑백 들고
그 자리에서 서 있었어.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숨 한번 길게 쉬었지.

그 짧은 순간이
이렇게 말해주더라.

“넌 아직 살아 있잖아.”
“잊힌 게 아니야.”
“사라진 것도 아니야.”

누구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


---

칼 로저스가 이런 말을 했대.
“진짜 나로 살기 위해선,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내 선택을 따라야 해.”

듣고 나니까
쿡, 마음이 찔리더라.

나로 살아가겠다는 건
누구를 버리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일이구나,
그걸 깨달았어.

나를 지워가면서
누군가의 전부가 되는 게
과연 사랑일까?
진짜 책임일까?

요즘엔 좀 달라졌어.
내가 먼저 살아야,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더라.


---

그리고,
또 하나 깨달았어.

‘엄마니까’,
‘아내니까’,
‘가정이 있으니까’…

그 말들,
그냥 내가 내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으려는
핑계였던 거야.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지만
사실은…
불안했어.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게 편했거든.
모험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해도 변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편했어.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나를 가두고 있었던 건
가족도, 상황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었더라고.


---

그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마음이 찌릿했지.

근데… 이상하게도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숨이 좀 쉬어졌어.

“그래,
나 사실 좀 무서웠어.”
처음으로,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해봤거든.

그랬더니
조금씩,
진짜로 조금씩
용기가 생기더라.

뭐든 잘할 필요 없어.
그냥 나로 한번 살아보는 거야.

작은 것부터.
하나씩.
내 안에 숨은 가능성들을
꺼내보는 거야.


---

그래서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를 새장에 가두지 마.
핑계로 나를 덮지 마.

나는 이제
핑계를 버리고
가능성에게 손 내밀 거야.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괜찮아.

그래서 나는,
나를 다시 살아보려고 해.

조금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진짜 내 이름으로
숨 쉬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이전 08화절벽에서 나를 발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