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나에게만 울리는 알람이 있다. 그것은 아침마다 보드랍고 따뜻한 살갗을 비비며 깨운다. 은은하게 비누와 로션, 침이 섞인 냄새가 나고, 약간은 앙칼진 소리가 나는 인간 알람, 나의 아기.
"엄마 일어나, 아침이야."
인간 알람과 함께한 지 꼬박 1,300일이 된 나는 휴대폰 알람 기능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아이는 자는 시간이 달라도 어찌 된 것이 일어나는 시간은 항상 7시이다. 그래서 나도 마찬가지로 자는 시간은 저녁 10시, 11시, 12시 각각 달라도 기상 시간은 7시로 정해져 있다. 나의 알람이 고장 나지 -아프지- 않은 이상 말이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시간은 9시 30분이니까, 약 2시간 30분 동안 나의 알람 아니, 나의 아이와 오전 시간을 보내게 된다. 2시간 30분이면 영화 한 편을 보는 짧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육아하는 2시간 30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의 엄마와 등원 시간이 겹쳐 스몰 토크를 하던 중에 그 집 아이는 9시에 겨우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9시에 겨우 일어나서 눈도 못 뜬 아이 밥 먹이고 헐레벌떡 등원시켰어요." 볼멘소리로 불평인 듯 아닌 듯 이야기하는 엄마가 나는 조금 부러웠다. 9시 기상? 그럼 아침 육아는 눈 깜짝할 새에 끝나는 것 아닌가? 사실 9시는 바라지도 않고, 8시에만 일어나 줘도 아니, 7시 30분에만 기상해도 말끔한 정신으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집 아이의 취침 시간은 저녁 10시, 11시라고 한다. 우리 아이의 취침시간은 9시이니, 아침에 고생하냐 저녁에 고생하냐 조삼모사일지도 모르겠다.
고생이라는 단어를 썼다. 나의 아이를 육아하는데 고생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10년 앞선 육아 선배들은 지금 이 시기를 소중히 하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10년이 지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또 그 단어를 가져와 써야 할 거 같다. '고생'을 하는 와중에도 맑은 해님 같은 얼굴로 해사한 웃음을 짓는 아이를 보면 흐르는 시간이 아쉬울 때가 있다. 그 시간도 잠깐, 어느새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 목소리로 아이에게 명령하는 어조로 다그치는 나로 돌아온다.
간단히 참치 주먹밥으로 아침밥을 먹이고, 양치와 세수도 시키고, 모닝 응아까지 마쳐도 아직 8시다. 그래도 이제 제법 컸는지 무조건 엄마에게 놀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있는 엄마를 한 번 쳐다보더니, 요즘 가장 좋아하는 폴리 장난감 세트를 꺼내어 야무진 손놀림으로 놀이를 시작한다. 물론 매번 혼자 노는 것은 아니고, 엄마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때가 열에 다섯 번 정도.
등원 시간이 가까워지면 아이와 함께 나갈 채비를 한다. 나의 왼쪽 손엔 아이의 손이, 오른쪽 손엔 아이의 가방과 나의 수영 가방이 들려있다. 최대한 기분 좋은 목소리와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아이를 어린이집 선생님께 맡기고 돌아서면 후련한 마음보다는 걱정과 미안함이 남는다. 그런 약간의 찝찝한 마음을 안고 곧바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켜고, 고정된 주파수인 107.7 FM 라디오를 들으며 수영장으로 출발한다. 수영장에 도착해서 탈의를 하고 샤워를 할 때쯤이면 등원할 때의 걱정과 미안함, 고생까지도 씻겨나가듯 홀가분해진 마음이 든다. 그리고 씻겨나간 불편한 마음에 수영을 할 설레는 마음과 강습에 대한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진다.
네 가지 영법인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을 모두 배우고 나면 드릴이라고 하는 기본기 연습을 하게 된다. 한 팔로만 접영을 한다든지 다리 사이에 킥판을 끼우고 모든 영법을 하기도 하는데, 흡사 물고문이 따로 없다. 매번 새로운 물고문 아니, 드릴로 회원들을 괴롭히는 강사님 덕분에 수업 50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다. 강습이 끝나고 나면 모든 체력을 소진한 채 후덜 거리는 팔과 다리로 샤워실에 들어서지만 그때만큼 뿌듯한 순간도 없다.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강습에 출석하는 회원이 많아져 수영장 물속뿐만 아니라 샤워실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우리 수영장은 줄 서서 대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눈치게임에 성공해야 빨리 샤워를 마치고 나갈 수 있다. 수영장 좀 다녀보면 씻는 사람만 봐도 이 사람이 수영장에 들어갈 것인지 수영을 마치고 탈의실에 갈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사람의 눈치를 보고 빨리 씻을 사람인지 그런 것은 상관없고 발 각질까지 제거해야 샤워를 마칠 사람인지도 눈치로 알아보고 피할 수 있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또 다른 눈치게임이 시작된다. 회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탈의실 자리와 헤어드라이어를 사수하기 위한 눈치게임. 게임을 잘하려면 좋은 아이템이 필수이듯 나는 집에서부터 이고 지고 온 다이슨 드라이어로 빠르게 머리를 말리고 간단한 기초 화장품과 선블록만 바르고 탈의실을 빠져나온다. 보통은 집으로 돌아와 예약 시간을 맞춰둔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내 건조기에 넣고, 간단히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 아이에게 먹일 간식과 저녁 반찬을 준비한다. 앞치마를 벗을 때쯤 건조가 끝났다는 알람이 울려, 건조된 옷가지들을 꺼내 차곡차곡 접어 남편의 옷장에 아이의 옷장에 나의 옷장에 넣어 정리한다. 아침에 청소기를 돌리지 못한 날이면 창문을 모두 열고 청소기를 한 번 휙 돌린 다음 물걸레 청소기의 전원을 켠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 거실과 방, 부엌에 군데군데 매트를 깔아 두었는데, 아이가 한 살 먹을 때마다 개수가 늘어나다 보니 크기와 높이가 제각각이다. 물걸레 청소기를 돌려놓고 유유자적 쉬면 좋으련만 방마다 매번 모셔다 드려야 하고, 거실을 청소할 때는 잠깐 한눈을 팔면 삐비빅 경고음이 울린다. 매트와 소파 사이의 틈에 들어가 걸리고, 거실 청소가 끝나지 않았는데 부엌으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럴 거면 그냥 내가 밀대로 미는 게 낫지 않나 싶지만, 어깨와 허리를 생각하면 그래도 지금 방법이 옳은 것 같다. 그저 바닥에 깔린 매트를 모두 청산하고 나뭇결 바닥을 볼 날을 학수고대할 뿐. 그나마 오지 않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희망으로 버티고 있다. 물걸레 청소기의 물걸레를 내가 빨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남아 있지만, 세탁기를 돌리기엔 또 너무 아까운 듯하여 손빨래 후 탈탈 털어 베란다에 널면 일이 마무리된다. 소파에 드러누워 긴 숨을 몰아 내쉬고 휴대폰을 열어 필요한 식재료를 골라 주문한다. SNS로 친구들 소식과 잡다한 숏폼을 보다 보면 어느새 아이의 하원 시간이다.
보통의 날이 아닌, 수영을 마친 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소위 땡땡이를 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미리 전날부터 계획을 하는데, 빨래를 저녁에 해두고 다음날 먹을 음식도 준비해 둔다. 수영을 마치고 기초제품과 선블록으로 마무리하던 루틴에서 쿠션 팩트도 톡톡 바르고, 눈썹도 정성스럽게 그린다. 아이라인까지는 과하고 속눈썹 파마를 한 눈썹에 블랙 에센스를 발라 마스카라를 한 듯한 효과를 주고, 입술도 붉게 채운다. 머리카락은 말리기만 하고 묶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돌돌 돌려가며 말리고 정수리를 중심으로 드라이어를 이용해 뿌리 볼륨도 살려준다. 그런 날은 옷도 조금 신경 써서 입고 나온다. 차에 시동을 켜고 휴대폰 내비게이션 앱으로 도착지를 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설정한다. 평일 낮의 도서관은 주차 자리가 한두 개쯤은 늘 비어 있다. 그나마 도서관 입구와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도서관에 들어선다. 도서관 특유의 책 냄새와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작은 소음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예약해 둔 도서를 접수대에서 찾기도 하고, 캡처해 둔 책을 검색대에서 찾아 대출하기도 한다. 보통 두세 권의 책을 한 번에 대출하는데, 기간 연장까지 해두면 마음이 든든하다. 빌린 책을 모두 읽는 것은 아니다. 보통 한 권은 생각한 내용의 책이 아니라 금방 덮게 되고, 못해도 한 권은 끝까지 읽으려고 노력한다. 빌린 책을 들고 집에서 가까운 스타벅스로 차를 옮겨 주차한다. 평일 낮의 스타벅스는 혼자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모두 나를 바라보는 형태로 벽면에 한 명씩 약속이라도 한 듯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하거나 책을 꺼내 공부를 하고 있다. 나도 암묵적인 약속처럼 연속으로 비어 있는 세 자리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짐을 푼다. 점심으로 아이스 카페라테와 햄&루꼴라 올리브 샌드위치를 먹으며 빌려온 책을 펼친다.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거나 번뜩 드는 생각이 있으면 휴대폰 메모장에 옮겨 적는다. 어떤 때는 한 문장이 아니라 문단으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럴 땐 브런치스토리에 접속해서 글을 쓴다. 일필휘지 할 정도로 글 깜냥은 없는 관계로 글을 완성하지는 못해도 제목과 서두를 쓴 것만으로도 다음에 접속했을 때 백지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글을 쓸 때 부담감이 훨씬 줄어든다.
오전 육아 후, 내가 좋아하는 수영을 신나게 한 다음 집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 두세 권을 고른다. 가까운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겨 간단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도 쓴 하루. 휴대폰 배경 화면을 아이의 사진으로 해두지 않았다면 나는 스스로 유부녀, 애엄마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결혼 전, 회사를 다니면서 나에게 주어진 휴일에는 도서관에 가거나 카페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산책을 즐겨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서너 시간의 한낮의 꿈같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내가 진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300일을 꼬박 아이와 함께 일어나 씻기고, 먹이고, 놀아주고, 재우면서 살림을 한 전업주부 박윤정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아이러니. 그건 그냥 부캐인 엄마 박윤정. 나의 본캐는 스스로 나라고 생각이 드는 수영하고, 책 읽고, 글 쓰는 나 박윤정.
엄마를 부캐로 두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본캐보다 부캐는 조금 덜 열심히 해도 되지 않나? 부캐는 조금만 잘해도 칭찬받으니 말이다. 물론 어느 자리에 가서도 "저의 본캐는 따로 있고, 엄마는 부캐예요."는 말을 할 자신은 없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스스로에게 본캐와 부캐를 정해주었으니 성실히 나의 캐릭터를 이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