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끄적인다
설교하는 목사님의 말이 지루해
시간 때우자 생각 없이 끄적인다
어떤 방향도 정해놓지 않고
의지도 결심도 주제도 없다
멍하니 풀린 눈으로 흰 종이 보며
몇 줄 끄적인다
다만 이 손은 내 의식이 아니다
이 오른손은 생각 없는 나보다
생각이 많은 거 같다
군인이었을 때, 영내에 있는 기독교에 참가하게 됐는데 목사님의 말이 너무 지루해 종이를 꺼내 낙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평소 낙서를 잘하지 않았는데 그 날은 웬일인지 아무 생각 없이 낙서를 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낙서가 그렇듯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지 않았으며 어떤 목적이나 방향 없이 끄적였습니다. 동그라미, 세모, 정육면체, 책의 구절 등등 생각나는 대로 손을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낙서를 하고 있으니 왠지 마음의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사실 좋은 말씀을 해주시며 병사들을 독려해주시지만 그 시간 했던 낙서가 오히려 제게 더 도움이 됐습니다. 마음이 안정되며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사실 낙서라는 게 우리의 뇌가 생각해 손을 움직여 적은 행위이지만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멍한 상태나 어떤 다른 행동을 하며 수반되는 부가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뿐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면 손에도 의식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손도 의식을 가지고 있고 욕구를 표현하며 우리에게 알리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손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뇌의 통제를 넘어 손이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 낙서는 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낙서를 해야겠다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하면 안 됩니다. 손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요새 멍 때리기 대회가 유행하던데 아마 멍을 때리며 손을 움직여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다 보면 혹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될 수도 있겠지요.
낙서
당신이 알지 못했던 은밀한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