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시옷

by 윤수

기울여 쓰면 얼핏 보기엔 헷갈릴 정도로 기울기와 사잇각이 미묘하게 다른 둘은, 닮은 점은 닮아서 또 다른 점은 달라서 서로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지금도 언제부터였다고 꼭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밤새 주고받던 메시지였을까, 같이 테니스장을 바라보며 먹던 편의점의 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었을까, 망원역에서 헤매며 찾아낸 그 해 첫 붕어빵이었을까, 기억과 시옷에게 불씨가 되어주었던 것은.



쓸쓸한 가을 날씨와 장소가 만들어낸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달아오른 서로의 체온은 아늑했다. 기가 막히게 적당히 맞아 떨어지던 시간들은 우연이라기엔 옹골차게 쌓여가 서로 운명이라고 굳게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 었다. 기역과 시옷의 부푼 마음은 가라앉기는 커녕 아슬아슬하게 더 커져만 갔고, 서로는 이것저것 잴 것도 잴 시간도 없이 밀도 높은 그 시간 속으로 기꺼이 빨려 들어갔다.



같은 대학교에 같은 학번으로 입학하게 된 것도, 같은 해 같은 기수로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된 것도 ‘만약’이란 전제로 가지를 쳐나가다 보면 서로는 서로에게 수 만분의 1의 확률로 얻어낸 우연이었다. 이야기를 섞었던 몇 번의 시간을 잡지 못하고 동아리가 끝나갈 즈음에야 친해진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서사를 만들어 준, 스쳐 지나간 기억이 될 뻔한 서로를 결국 이어주기 위한 시나리오였다고 생각하면 마냥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그 밖의 모든 시간들, 시옷이 없던 때의 아쉬운 순간과 악연까지도 결국 시옷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기역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에서 더욱, 한 수라도 틀렸다면 평생 마주하지도 못할 뻔한 시옷을, 기역은 사랑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 사실 필연적인 만남이었음을 믿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지금에서야 기역은 시옷에게 그만큼 끌렸다고 고백한다. 평범한 설렘과는 달랐던 두근거림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특별했다. 종종 시옷이 사랑의 이유를 물어 올 때마다, 기역은 그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주었지만 사실 기역도 잘 알지 못했다. 하나를 대라면 하나를 댈 수 있고, 백 개를 대라면 백 개를 댈 수 있었다. 시옷의 배려가 좋았다. 기역이 넘어질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시옷의 살짝 올라간 눈과 고르게 뻗은 코, 웃을 때 네모나게 벌어지는 입도 좋았다. 듣다보니 목소리도 좋아졌고, 보다보니 일자로 자른 머리카락도 귀엽고 긴 손가락도 예뻤다. 기역의 한 마디나 한 글자도 흘려 듣지 않는 진지함도 좋았다. 기역에게 보여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수함도 귀여웠다. 기역 자신보다 기역을 더 멋지게 봐주는 시옷의 시선도 좋았고, 시옷과 함께 있는 기역 자신의 모습도 좋았다.



⠀ 하지만 그 이유가 몇 개든 큰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기역은 그냥, 기역 옆에서 기역의 말을 들어주고 어깨를 빌려주고 기역의 눈을 맞추어주는 시옷이 그냥, 좋았다. 머리카락이 길면 길어서, 자르면 짧아서 사랑스러웠다. 척척 잘 해내는 모습은 든든해서 좋았고, 넘어지거나 실수하는 모습은 귀여워서 좋았다. 시옷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시옷의 집에서 고개를 돌려 시옷의 얼굴을 잠깐 훔쳐보던 어느 저녁. 그리고 늦잠을 자고 있는 시옷의 옆에서 가만히 빗소리를 듣던 어느 흐린 아침에 느꼈던,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 없던 충만함이 기역을 다짐하게 했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시옷을 사랑하겠다는 소박하지만은 않은 다짐을 말이다. 시옷은 알까, 어떤 형태의 마음인지. 기역은 곧 시선을 거두어 가만히 시옷의 콧노래를, 숨소리를 들으며 혹여나 풀어질까, 시옷이 묶어둔 기억 속에 자신의 몸을 더욱 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