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루츠캔디 Nov 29. 2024

열 보 전진을 위한 한 보 후퇴

여초직의 비밀, 연약함은 포식자들에게 탁월한 효용가치를 제공한다.

처음부터 철없고 경제적으로 대책없는 엄마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 생각이 없지만 혹여나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면 내 삶의 반직선안에 어떤 시점에서 해야할지, 그 후 언제 출산하고, 어떻게 육아해야할지에 대한 계획수립이 전반되어있었으며, 이는  내편인 세상에 더해 실행력을 갖춘 나 라는 사람이 너끈히 해 낼 수 있을거라 너무 당연해서 장담할 필요조차 없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직장도 대학부설 유치원으로 유아 정교사 자격을 가진 초임 교사가 가장 잘 갈 수 있는 자리였다. 초등학교 선생님에 준하는 국공립 유치원 선생님대우가 거의 모든 유아교육과 학생들의 드림직장인데, 거기에 1.5배 이상 초월한 연봉이며, 복지, 그리고 이  커리어에 대해 생각할 때에도 이만한 자리가 없었다. 정교사인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출산휴가 1년, 그리고 육아휴직 3년의 기간. 출산수당, 육아수당. 그리고 일년마다 늘어나는 휴가. 퇴직금. 분기별 보너스, 자기계발비용과 처우수당, 품위유지비, 체력단련비, 연금... 결혼뿐만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후에도 교사 생활만 해도 괜찮았다.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경력을 쌓아서 나의 영역을 확장시켜도 좋을거라 맘껏 연보랏빛 꿈을 꾸기에 무리가 없었따.


한 반에 열 명 전후 되는 아이들에 나를 눈치껏 도와주시는 전문 부교사 선생님이 계셔서 잡무가 없었고, 학교 부설기관으로 실습생에 자원봉사자 학생들까지, 적을 때는 3명 많을 때는 4-5분까지 나를 도와주시는 선생님들이 함께 계실 수 있으니, 이 모든것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봐도 사실 다들 내로라하는 전문직이 부럽지 않은 수준의 자리였다.


누가 그랬다. 일반 회사에서 여직원은 나중에 경쟁에서 그리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지만, 유아교사는 아이를 낳은 후에도, 자신의 아이를 낳고 기른 경험을 살려 훨씬 더 능력좋고 수요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첫 연봉이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대신 결혼과 출산 후에도 오랫동안, 원감이나 원장을 달고, 프로그램 디렉터가 되거나 경험과 학력을 살려 해당 직종의 대학교 교수가 되거나 인접 학문으로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고. 해당학과중에서 일렬로 세우면 소위 명문에 속하는 편이니 학력으로보나 커리어로 보나 동종업계 최강자가 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언뜻 보면 신빙성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은, 학교에 본원 말고 이윤목적으로 새로 생기기 시작한 '평생교육원'에서 공급하는 막대한 유아교사 인력으로 우리의 반발을 살까 두려운 학과 교수들의 우리를 향한 사탕발림, 살살달램, 타이름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4년 공부한 사람과 1년 공부한 사람이 같을 수 있나. 짧게 공부한 사람에게 낮은 임금을 주고 쉽게 쓰고 갈기 원하는 사용자들의 니즈를 맞춘다는 것이 어떻게 생애 전반 중 가장 중요한 기간인 아동기를 위한 교육분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4년내 장학생이었던 동시에 졸업 직전 학기,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며,  교수님들에게도 나는 언제나 우등생에 진취적이며 센스있는 학생으로 눈도장 찍어놓았으니 성적이며 정치며 아카데믹한측면에서도 나는 이미 동학과 동학번 안에서도 선두를 점했다 믿었다.


틀린말은 아니었다.




임신과 동시에 부랴부랴 결혼을 서둘렀고, 입덧으로 신혼을 출발했으며, 임신기간 중 아직 열흘이나 남은 연차 미리 내었다. 


입덧이 워낙 심하니 출산 전후로 언제든 쓸 수 있는 출산휴가를 임신 중반부터 미리 쓸 까 고민하던 시기의 나에게, 원장은 내 주특기가 '학부모상담' 이었기에, 미리 있을 '학부모상담' 때문에 내 서류를 썩 시원찮아하겠지만, 법적으로 내 서류를 처리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므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침대에 누워서 출산휴가 시점에 대해 고민하며 있는 동안,


꽝!꽝!꽝!
캔디야!
캔디야 문열어라! 캔디야!
꽝!꽝!꽝!


또 시어머니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다. 난 쉬고 싶었다. 그날도 새벽부터 그 시점까지 구토를 두세차례나 해 대었고, 신경은 온통 출산휴가 여부에 곤두서 있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구토가 나오지 않을 때만이라도, 옆집에서 밥짓는 냄새가 나지 않는 지금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만이라도 좀 눈을 붙이고 싶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문을 열지 말지 내 집에서 내게 권한이 있으므로 문을 열지 않았다. ...


그렇게 현관문을 두들기며 고함치는 소리를 약 3분정도 참아냈을까? 시어머니는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 주인집인 윗집에 올라가 마스터 열쇠를 빌려 문을 기여코 따고 허락없이 성큼 내 집에 들어오셨다. 아............... 이미 우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천적이라는 걸.



시어머니는 나를 또 데리고 어딜 가고 싶으시단다. 그렇게 울렁거리면 방에 누워만 있지 말고 병원에 가잖다. 내가 '입덧이 울렁거리는것이 당연하지 어딜가요'  하니 누워있는꼴이 보고 싶지 않단다. 성격상 원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시어머니이시다. 당신의 조카며느리네 다자녀 우대정책으로 강남어디 아파트 청약 당첨되었다고 그 집에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단다. 중도금을 너네 친정에서 보태 준다면 너네도 런 아파트에서 살 수 있지 않겠냐며, 구경가자고.. 너네 친정은 돈 있지 않냐고, 아빠 한테 도와달라고 하라고. 또 괴롭히러 오셨다. 또.



난 시어머니의 가난을 알기에 결혼비용을 보태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결혼할 때 도움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 집은 남자 몫 또는 적어도 반은 보태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 한푼도 보태주시지 않았다. 그 부분에 불만이 진심으로 없으며, 그 문제로 남편과 싸운적도 남몰래 억울함을 참아낸 적도 없다. 아무렇지 않다. 온전히 그 분의 경제 사정을 받아들이고 인정 해야만 남편과 나, 그리고 시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성립됨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기에, 늘 그렇듯 내가 상대의 사정을 '적어도' 일방적으로라도 이해하는 쪽으로 사고가 돌아가는데, 어쩜 저분은 남에게 받아내고, 남이 도와주고, 남이 이해하는 쪽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뻔뻔하기 짝이 없다.


내 아들집에 내가 들어왔는데 누가 뭐어래!


결혼할 때도 내게 아파트 열쇠를 예단으로 갖고 오라고 했던 시어머니. 또 그 소리다. 결혼할 때 나의 친정부모님께서 수십년간 직장생활로 만들어주신 몇 천만원안에서 혼수, 예물, 예단, 그리고 우리 전세집 계약금이 그 분 욕심에 차지 않았다. 



'누구네 집은 아파트 해왔다던데, 차 사줬다던데, 넌 대체 예단으로 뭘 해왔냐? (아파트와 밍크코트, 사치품은 너가 내게 준 적 없다는 뜻)...'


이런말은 시댁에서 뭔가를 해줬을때 또는 남편의 직업이 최소 전문직 이상일 때 듣는 말이라는 비공식적 표준이 무색하게도, 남편도 나와 비슷한 대학을 졸업하고, 일반 회사원 연봉을 받고 일하는, 그저 평범하고 건실한, 나보다 7-10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 2010년 초반, 남편이 모아둔 1억여 돈으로 전세집을 구한 우리다. 집이 작았지만 난 불만이 없었다. 남편은 5년간 사회생활을 했지만, 나는 25살, 즉 사회초년생 주제에 결혼이라는 걸 했으니, 모은 돈이 작으므로 불만을 가질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써 예약해놓은 인당 3만원대의 하객 접대 부페도 돈아깝다고 1만원대로 바꿔버렸던 시어머니다. 원래 결혼식대비도 신부측에서 신랑측꺼까지 모두 다 대 주길, 자신이 권사님으로 있는 교회에서의 예식이니 서울시내 한복판의 교회위치 상,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걸인들까지도 모두 모두 와서 널리 식사대접하고 싶다고 '신부측에서 돈 다 내라고' 혼자만의 셈으로 계산한 시어머니를 반대한 우리집에서 각자 손님에 대한 각자 식대는 각자 각자가 하자는 내 친정엄마의 의견제시에 온갖 육두문자로 돈돈돈돈돈돈 하며 결혼식에 하객 볼 면목없이 만들었던 그 분. 걸인들에게도 대접하자는 명목을 지워버리고, 3만원대 식대를 사돈은 물론 신혼부부인 우리에게 상의도 없이 1/3토막만 1만원대 식당으로 맘대로 바꿔버리셔서, 하객에게 면목이 서지 않았다.

..... 더 말하자만 대책없으니 이정도에서 옛날이야기는 줄인다.........



지난번엔 내 방 책꽂이에 꽂힌 일기장을 맘대로 읽고, 내가 돌아오니 일기장에 내가 쓴 문장을 자신만의 말인듯 내앞에서 말하시더니, 오늘은 현관문을 따고 맘대로 들어오셔서, 입덧을 치료하러 병원에 가자고 하신다. 나는 이 분이 이렇게 경계선 없는 면이 너무 싫다.


지금은 누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잘잘못을 판별할 수 있지만, 근 20년 전인 그 때에는


내가 어려서일까,
내가 시어머니 맘에 안드는 걸까
내가 부족한가
내가 못 미더운가
 
상대의 잘못된 행동보다는 나 자신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리며 고통스러워했었다.


'저 누워있고 싶으니 그만 나가주세요' 라는 말을 자신감있게 뱉지 못했던 약하고 자신감없던 나이다.





다음날 팬티에 피가 비쳐서 산부인과에 갔다.

절박유산이란다.


무리하지 마세요. 유치원 교사시면 그거 몸을 많이 쓰지 않나요?
그만두세요.


휴직상태여서 천만 다행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때 원장은 캐나다의 동종업계 디렉터들과 비교했을 때 대장감이라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공문서 처리를 하면서 짜증을 냈고, 가정사에 대해서 교사실에서 시시콜콜 통화내역을 우리에게 공개했었다. 당연히 법적으로 주어야하는 휴가등에 대해서도 자꾸만 왜 인지 시비를 걸며 통시켜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언가를 터놓고 의논하기 힘든 대상이었고, 차라리 골치아프게 이꼴저꼴 보느니 퇴사하려면 해라 식으로 우리를 대했던 것 같다.


개인적 영역에서 마음이 약한 것과 달리 사회적 영역에서는 어릴때에도 사리분별에 칼 같은 나였다. 나는 이 고용주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법적인 테두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고, 우리 모두가 나온 학교 교수에게 약자였다. 나는 그에 비해 교수님과 친분이 있었다. 법, 행정 등 외부 자원을  활용하는 법에 밝았다. 교수에게 원장을 꼰질르고 대놓고 정치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자원들을 바탕으로 지혜를 발휘할 수는 있었다.


캐나다의 유치원 디렉터는 한국의 원장처럼 갑질을 하거나 원인도 없는 사측이거나 하지 않다. 철저하게 이곳은 코워커를 보호해주려고 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 편에 서서 학부모나 외부인 앞에서 동료, 후배, 선배 교사를 보호하고 저항하고 대변한다. 한국과 캐나다의 노동현장에서 가장 크게 다른점이다.  아이를 낳아 변수가 생길 사람에 대해 차별대우를 한다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유아교육계는 마음이 유약하고 세상물정모르는 어린 처녀선생만 좋아한다는 소문도 떠도는 법이 없는 캐나다이다.


법적으로 나는 1년간의 출산 휴직기간이 끝나면 바로 붙여 3년간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다. 그럼 총 4년동안 나는 일정 임금과 보너스를 받으면서 육아를 할 수 있는거다. 그 후에 복직을 노려보아도 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원장과 논의하길 원했고, 원장은 나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거절하며, 사직하라고 말했다. 나는 '권고사직'이라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원장은 다시 이 서류를 반려했다.


권고사직이 되면, 원에 보충인력을 공급받아야할 시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란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싶냐며 나에게 협박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원에 보충인력이 공급되도록 도와줘야하지 않겠냐며 아이들이라는 약점을 걸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법적 대응을 준비를 했다.


나의  선임들도 관둘 때, 원장의 cheesy한 면에 대해 여러차례 언급했던 점이 있었다. 원장은 우리의 편이 아니니, 긴박하게 사직하지 말라고. 철저하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그만둬야한다고. 업무 상 아이를 안아야 한다거나, 텐트럼을 저지해야한다거나 해서 생긴 디스크에 대해 업무상 재해 즉, 산재신청을 원장에게 제의했으나, 반려당했던 선배의 말이었다. 그 원장 아래에서 6년이란 시간을 몸바쳐 충성했는데,  남은 것은 허리디스크뿐이었던 서나선배였다.




나의 사정을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은 싸울 기력이 되면 싸우겠지만, 너 그렇게 계속 구토하고 못 먹고 힘들어하는데 그냥 그만 두라고 말했다. 거기에 절박유산까지 선고받으니, 아이를 지키기위해서 이 시점에서 나는 물리적으로 누워서만 있어야한다.


곰곰히 계산해보았다.

원장이 3년간의 육아휴직을 탐탁지 않아 하고, 사직을 권한다. 물론 탐탁지 않아하지만 3년간의 육아 휴직 그리고 그 전 출산휴가 1년, 총 4년후에는 직업이 없는 시어머니에게 내 아이를 맡겨야하는데, 저렇게 개인간의 경계도 없고, 함부로 뱃속 아이한테다 대고도 부모험담이나 하는 시어른이라는 사람에게 내 아이를 맡기며 명색에 유아교사 엄마랍시고 아이를 성격장애자를 만들 생각하니 끔찍했다.


돈의 가치를 떠나서, 절박유산 상태로 부터 생명을 살리자. 휴가 또는 복직으로 인해 아이의 성격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내 커리어 몇 조각과 돈 몇푼 버느니, 내 아이 목숨을 지키고, 건강을 지키고, 교육하는데에 힘쓰자고 다짐했다. 


교사를 하고 싶다면, 내 아이를 양육한 이후에나 다시 업계에 들어오자. 그래도 좋지 않은가.


세상 물정에 밝다 자부했던 나는 결국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사직을 했다.


사직하지 않고, 4년 휴가를 썼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지 않아도 내 나라에서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둘째는 과연 낳았을까?

2015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후배 선생님들과 제자 아이들을 길러낼 수 있었을까?

지금쯤 나는 어느자리까지 올라가 있었으며, 내 아이들은 어떻게 중고등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을까?

내 집은 얼마 오르고,또 이번에 얼마나 떨어졌을까?

내가 더 나은 리더쉽을 배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확실한 건, 계획대로 실천하고 뿌듯함을 느끼고, 삶을 잘 살고 있던 나 였기에 박스 밖에 나와야만 배울 수 있는 용기와 짜릿함 그리고 뜻밖의 감사는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을 배웠겠지만, 그리고 그 둘 중 무엇이 더 가치있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