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신했을 무렵, 나의 시어머니와 전 상사만 나와 내 아이를 힘들게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괴롭힐 의도가 있던 건 아니다. 단지 그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의 선택이었어도, 실직에 대한 심리적 타격은 있는 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남들이 현타라 불리는 감정이 미친듯이 밀려왔다.지금까지 내가 노력하고, 공부하고, 취직하려 애쓰고, 또 그 곳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분석하고, 부모님에게 신뢰를 얻고...그게 다 무엇이었는가?
누군 특정직업을 비하하려는 목적인지, 나이트가서 몸파는 여자 직업 1순위가 유아교사라카더라.. 라며 분별력없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며, 우리를 스케이프고트 자리에 쑤셔넣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4시에 학생들이 하원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다음날, 다음주, 그리고 앞으로 있을 행사 준비에 행정일에 저녁 9시나 10시가 되어도 교사실에서 일에 여념이 없었다. 막차를 타고 집에가도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 그리고 나로 인해 돌봄받는 아이들을 보며 대리만족으로 누구나 존재하는, 나의 내면 어린아이 또한 자동으로 보살펴져서 참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었는데...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교사일은,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잘 파악하고, 그에 맞춰 반응하고, 교육 보육 프로그램을 짜고, 평가하고, 다음 학기에 반영하고, 나와 다른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인해 아이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느끼는 내 성향과도 잘 맞는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일련의 작업들을, 내가 하루를 보내던 방식을, 계획에 없던 허무한 방식으로 놓치게 되었으니,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이 삶의 방식에 대한 막연한 회의감이 들었었다.
내 시간을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채우나...
나의 사직과 거의 동시에 이민을 계획한 남편은, 그 때부터 회사 점심시간마다 사무실 가까운 이민업체마다 상담을 다녔고, 이와는 별개로 나는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실직자 교육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임신한 몸을 안고, 이 곳 저 곳 재교육의 기회를 찾아 헤매다녔다. 교육비를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이 프로그램은, 시작 전에 우선 3차례의 오리엔테이션에 반드시 참석해야하는 의무가있었는데, 이는 임산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웠다. 한국이라는 세상이, 2010년 이후, 20대의 임산부를 그리 부정하고 있는지 임신 전에 알 길이 없었다.
삼성동 코엑스 입구였다. 몸에 붙는 타임정장 원피스와 겉옷을 걸치고 입구를 통과하고 있는데, 츄리닝을 입고 나와 반대편으로 걷고 있었던, 나와 일면식도 없는, 그저 지나가는 내 또래 여자 사람 둘은 "임신했냐? 배가 왜 그렇게 튀어나왔어?" 하며, 5-6개월된 나의 튀어나온 배를 비하하는데 아무런 꺼리낌이 없이 막말을 뱉었다. 얼굴을 보면 20대인데 설마 임신했을리 없이, 살찐 것이라 생각하고 살이 찌고 배가 튀어나올 때까지 태만한 나를 저격하고 싶었나본데, 누구도 감히 인식하지 못했으나 나는 엄연한 임산부였다. 작지 않은 이 키에, 막달까지 59kg을 유지하던 몸이라 배 이외에는 아무곳에도 살이 찌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임신 중반과 말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뱉은 말이 영향이없지 않았을거라 본다. 참, 내 몸에 내가 임신하는 것도 주변의 질타를 받아야한다니.
요즘 같은 시대에 제대로 공부하고, 일하고, 정신이 똑바로 박혔다면 20대에 절대 임신하거나 결혼할 리 없다는 그 들의 논리 하에, 저 얼굴로 임신했다는 것은 , 돈있는 남자 어린 몸둥이로 꼬셔서 취집이나 일삼는 이기적인 한녀, 된장녀, 남들 다 하는 공부라는 건 해본적 없는 날라리 멍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실이 그렇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이, 편견에 잡힌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 틀 안에 나를 그렇게들가두더라.
약 15년전 한국에서 버스를 탈 때에도, 나는 설마 임신했을 20대 임산부였기때문에 임산부좌석에 양보 받지도 못했었다. 아무렇지 않게 핑크색 의자 커버가 씌여진 임산부를 위한 자리에 앉아 눈알만 굴리며 긴가민가 하는, 나보다 건장했던 30대 아줌마는 자신이 내릴때야 비로소, "어머나, 임신하셨는지 몰랐어요. 얼굴만 보고" 이러며, 당연히 누려야 할 내 권리도 얌시럽게 잘도 빼앗아 갔었다.
"너 나와!" 할 권리가 있는 엄연한 임산부자리였는데도, 나의 혼전임신사실과 시부모의 박해, 실직상태로 인한 정신적 타격은 나를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게 했는지, 나의 아이와 내 자신을 보호할만큼 세상에 당당하지 못했던 것 같다.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내 자신의 권리 인식과 요구에 스스로 수동적이었던 것 말이다.
아이를 출산 한 후, 백일이 지나고 돌이 되기 전 아이를 가을 한 낮 유모차에 태워 우리가 살던 남산공원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을때의 일이다. 따뜻한 햇살에 아이를 얇은 이불로 한겹 덮히고 안전한 거리에서 조용하게 산책하고 있었는데, 근처 사무실 여직원들이 점심시간에 커피 한잔하며 수다 삼매경이었나보다. "저렇게 어린 아이들 함부로 데리고 나오면 안되지 않아?" 아이 키우는 엄마들을 맘껏 세상에서 따돌리라고 만들어 선물로 준 말, 도치맘, 헬리콥터맘, 맘충.....죄책감도 없이 누구나 아무렇게 어디에나 맘대로 분별없이 잘도 붙이더라.
경계선도 없이, 예의도 없이 어이없게 훈수를 두려는 사람들이 방어력과 공격성이 다소 낮은 20대 산모, 어리고 순해보이는 엄마 주변에는 의도치 않게 둘러쌓인다.
알아서 잘할텐데, 나 나름 육아에 자신있는 사람인데, 나이만 많고 얼굴만 늙었다고 모두 마음이 성숙하고 능숙하고 인자한 엄마가 아닌데,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딱 봐도 보이는 엄마로서의 역할과 자리를 부정당하기만하니, 덮어두고 무작정 내가 과소평가당하니, 겉으로 보이는 어린 엄마이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받고 덩달아 함부로 평가받아야하는 아이에게 미안하기도했다.
내가 질문했을 때 감사하게도 정성다해 답해준 상대에게, 물에 빠진사람 구해줬더니 봇짐내 놓으라고, 되려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었는데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중간과정에 대한 왜곡이 들어간 심리성격장애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은 뭐 그리 완벽하다고 상대에게 원치 않는 훈수를 두려하는걸까
왜 사람들은 다른사람과 사이에 있는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것에 당당할까
누가 그들에게 배우고 싶다 요청했는가, 무슨 가치관을 갖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지나가는 사람인 당신에게 무조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남에게 훈수 두는 스스로에 매료되어 잠시나마 스스로의 불안을 감추는 사람들을 본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불안을 왜 그리도 인지하기 힘들어하며, 반사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걸까. 그런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무의식, 심리 이런 이야기들이다. 당신의 본심이 간파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뜨거운 감자를 양손에 번갈아들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왠만하면 이런식의 대화를 피하는 모습들이다.
한편, 나는 왜 그들이 내게 무슨말을 하든 대차게 걷어차지 못했던걸까. 왜 나 자신을 보호해야한다는 의식이 탑재되지 않았을까. 내 말처럼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인데, 나는 왜 영향받는 것일까?깊이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았었다. 정답은 People pleaser가 되어야 했던 나의 과거부터 쌓여온 데이터 때문이었다. 엄친딸.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정의 부모님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관심을 외부인들에게 충족받아와서 나도모르는 사이, 사람들의 반응과 칭찬에 젖어산 나머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당황했고, 쇼크받고, 어쩔 줄 몰라했던것은, 10대이전의 타인의 반응을 안전기지로 삼던 나의 습관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대학교, 20대가 되어서도 특별한 계기없이 이어졌던것이 원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보호차원에서 목이 한번 쇳줄에 묶였던 강아지는 한동안시간이 지나고 목줄이 풀리고 들개가 되어도 스스로 인식 없이는 이제는 풀린 쇳줄에 매몰되어 그 주변만 서성이는데 딱 그꼴이었던 거다.
겨울 재롱잔치 무대에서 혼자 달달달 떨며 긴장끝에 공연을 마쳤다 믿는 어린아이 같은 삶, 관객은 모두 자신들의 아이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나의 공연은 관심밖인데...충분히 즐겨도 되는 내 인생 내 무대에서 떨고 긴장하며 숨죽여 타인의 반응을 기다렸던 거다.
써 놓고 보니, 내가 소수로서의 곤욕을 경험한 건, 내가 동양인 이민자 여성으로서 캐나다에서가 처음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남들이 20대 처녀 총각으로서 최선을 다해 재미나게 열심히 살 때, 유부녀가 되고, 아줌마가 되면, 아줌마 집단안에서 어린여자가 되든 내 나이 또래의 집단안에서 혼자 아줌마가 되든, 어떤 한 집단안에서의 소수가 되므로, 대세를 순항하며 유유히 사는남들 처럼 튀지 않게 살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나, 외롭고, 늘 내 존엄성을 지키기위해 부르짖어야만 겨우 손해를 면할 수 있는 현실은 내 나라 한국에서부터시작되었던 일이었다.
서른 살, 적어도 스무살까지는 부모운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기에 테가 나지 않지만, 모두가 공평하게도 결국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자신의 능력대로, 노력대로, 소신대로, 또 각자의 운이 있는 그대로 테가 나고, 그것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모 아래에 있는 때 까지는,남들과 같은 신체를 타고 나고, 남들이 있는 부모가 있고, 보호를 받고 살았기에, 더 크게는 학교 등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무난히 살았기에, 소수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전체 집단 안 과반수 이상에 속했던 보통 사람이었기에 한번도 세상의 소수집단안에 속한 사람들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굳이 소수집단에 속한 사람의 입장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아이에게 경험을 통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남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소수에 놓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며,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하는 두뇌기능이 비의도적으로나마 발달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에 반은 다행이요, 반은 서글프다.
그제서야 세상에 눈이 띄였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마음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성소수자들, 미혼부모의 자녀들, 이혼가정의 자녀들,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 외국인들... 세상에는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소수들이 많다.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대중의 진심일지언정, 보이지 않아 의도치 않게 다수 대중인 우리에 의해 괴롭힘당하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오랫동안 혹은 너무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와서, 밟혀도 원래 익숙한거라 문제의식이 없고, 자기자신 또한 스스로의 편이 되어주지도 못하는 확신없는 사람들말이다.
그때로부터 15년 쯤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시기는 바로, 달팽이가 껍질밖으로 나오는 순간, 병아리가 알 밖으로 나오는 순간, 즉 세상이 내 맞춤으로 짜여져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세상에서 정의하는 1318이 아닌 나만의 진짜 사춘기를 막 지난 시간이었던거다. '세상이 내 맞춤이 아니라는 사실'....
이는 남녀노소, 인종, 민족, 종교, 빈부, 다수 또는 소수, 여야와 아무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부모의 파워, 인맥, 두뇌능력,학벌, 직업, 사는동네, 외제차 국산차 주인, 강남 비강남, 수도권 서울, 아파트 빌라, 자가 월세...그 모든 조건과도 상관 없이 숨쉬고 깨어있는 누구나가 느끼는 감정이다.
원래부터 세상이 너와 나를 위해 맞춤형으로 차려진 밥상이 아님을 정중히 받아들여야한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세상에 나를 향한 불만족스런 대우에 대응하려 자신의 노력을 탓하고, 주변사람들이나 사회를 탓하여 나라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학력을 업그레이드 하며, 집을 사고, 로스쿨을 간다. 내 몸에 맞는 평생직업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이직을 한다. 아이들은 일류대에 입학하려한다. 하지만 그 후 찾아 오는 것은 의미없는 허탈감뿐이다.
이유는, 원래 세상이 특정개인을 위해 설계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causation 즉, 인과 결과라 믿고 세뇌된 조건들이 causation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주면 내가 원하는 대우가 찾아올줄 알았는데, 막상 이뤄놓고 보니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모든 직업, 모든 학력, 모든 나라에서도 예외가 없이 원래 세상은 각 개인 한명한명을 위해 케이터링 된 곳이 아니기에 조건이 바뀐다고해서 세상이 내게 다른 대우를 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거 착각에 불과하다.그것을 알아채는 삶의 어느 시점이 반드시 개개인에게 온다. 매몰비용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 알아채기까지 얼마가 걸릴지, 얼마만큼의 비용을 소진하게 될지는 개인의 알아차림 능력에 달려있다. 로스쿨에 가고, 치대에 가고, 의사가 된다고 해서, 영주권을 딴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통달하고 부자가 되어 돈이 나를 위해 일하는 구조를 짠다고 해서, 영어를 정복했다고 해서, 그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부터 내 세상이 열리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저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새로운 터널이 또 다시 열린다. 절대로 세상은 내가 만족할 만한 대우를 주지 않는다.
해결 열쇠는, 안간힘을 쥐고 놓칠까 두려워 부여잡고 있던 자기중심성을 겸허히, 깨끗하게, 용감하게 내려놓는 것에 있었다.
차라리 애초에 이 세상이 원래부터 그런것임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맞추려기보다, 대세에 순응하고 줄서고, 나보다 먼저 출발한 누군가를 이기려하기보다, 나 자신의 장점과 부족한 면을있는 그대로 인식해주고, 나만을 위한 세상을 차릴 힘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있음을 인지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내 성격,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 어린시절의 상처로 인한 왜곡과 성격형성,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뭐 그런 개인적인 것들에 미친듯이 몰입해 내가 떠 먹을 밥상을 온전히 내 스스로 차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내가 존재하든 말든 관심없는 이 세상에 대고, 나 좀 알아달라고 pleasing..애원하고, 노력하고, makeup하고, 애교부리기보다는, 세상의 이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요하고 맹렬하게 자기탐색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다.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려 괴로워할 시간에, 세상 기준에 맞추려 노력할 시간에 잠이나 더 자고, 맛있는거나 더 먹고, 내 식구들 소중히, 따뜻하게 잘 챙기고 사는편이 훨씬 낫다.
그러니 너와 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살든, 삶의 상당부분 즉, 몸과 마음의 힘듦이 사실 '자기중심성'을 탈피하지 못해 오는 생각이므로, 피해의식이란 놈 또한, 남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 일까.
나의 경우, 특별히 세상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거나, 아픔을 겪거나,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내가 뚝심을 갖고 부르짖지 않는 한,다른 사람은 내게 크게 관심이 없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의 뜻을 진심으로 뼈저리게 깨우치고 받아들이는데 까지총 14년의 기간이 걸렸다.그 후, 내 스스로 방어력을 갖고 , 내 색깔을 찾고, 남을 끊고 내 생을 자유롭게 사는것에 적응하는데 치열하게 노력하고 성공한 기간 5년.
총 19년에 걸친 자기돌파,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었다.
세상의 불친절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 무렵, 나는 아이에게 이유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였다. 플라스틱 그릇은 아이몸에 좋지 않아 옥수수콘 재질로 만든 노란 그릇에 아이 이유식을 매끼마다 다르게 만들어 얼마나 열심히 먹였는지 모른다. 우리집 옆에는 좋은 한우를 파는 작은 마트가 하나 있었는데, 15년전에도 손바닥 반만한 것이 3만원 하는 고기를 사와 아이 이유식에 꼭 넣어 매끼 펄펄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난다.
모유를 먹이는 아이는, 4개월차부터는 철분이 부족할 수 있기에, 소고기를 열심히 먹였다. 아가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잘도 받아먹었다. 커다란 라면 용기만한 사기그릇 한 그릇 모두 소고기를 끓인 미음을 담아주면, 아가는 조그만 발을 옴찔옴찔 꼼지락 거리며 내가 주는 음식을 잘도 받아먹었다.
외출할 때에도 아이가 언제 배가 고플지 몰라, 작은컨테이너에 스푼, 물 그리고 가재손수건과 함께 아이의 음식을 들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아가는 작은 컨테이너를 여는 내 모습을 언제나 기대하는 눈빛으로 반짝반짝하게 집중해서 기다렸는데, 그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가 돌사진을 찍어주러 혜화동에 있는 매종드파리 or 살롱드파리 라는 스튜디오에 갔다. 그 곳 작가선생님이 아직 계시려나 모르겠는데, 세상밖에 처음 나온 외로운 어린 엄마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해주시던 선생님이셨다. 파리에서 유학했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아직 있는데, 자매가 함께 운영하던 그 스튜디오에서 나는 많은 마음의 힘을 얻었다.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나는 그 분들에게 나의 시어머니 이야기, 남편 이야기, 그리고 아이 이야기, 실직이야기 등을 가감업이 털어놓았던것으로 기억한다. 나처럼 다른 사람의 겉모다는 내면 그리고 눈빛을 바라봐주시는 아티스트 선생님들로부터 누구에게도 얻을 수 없는, 말과 몸짓으로 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위로를 받았었다.
내 손으로 주는 이유식을 받아먹던 내 아이 옆에서, 아티스트 선생님들이 세상에 갓 나온 어린 나에게 주신 이유식이었던 공감과 위로의 에너지로, 지금도 외국 나와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 때 어렸던 제게 마음의 이유식을 떠 먹여주신 아티스트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