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온지 1년 후에 연방이민을 접수하게 되었고, 1년여만에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지금 영주권받는것이 더욱 쉽지 않아진 것을 안다. 하지만, 과거에도 일정 자격이상 본국에서 자격을 갖추고, 준비된 사람을 뽑았지 아무에게나 영주권을 마구 뿌리지는 않았다.
과거에 영주권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에서가 아닌 캐나다에서 영주권을 받았다고 해서, 거짓된 서류로, 쉽게, 영주권만을 목적으로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영주권 자격을 갖는것은 아니었다. 캐나다는 그리 서류 검열에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며, 그런식으로 신청했다가는 부부를 비롯한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모두 해당 나라에서 추방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영주권 신청인과 배우자 학력, 업무 능력과 경력, 영어시험성적, 나이와 건강여부 그리고 재산등을 토대로 우리가족은 주정부이민이 아닌, 연방정부 전문인력이민제도 안에서 나와 내 남편은 캐나다 영주권을 받았다.랜트를 얻을 때에도 흔히들 캐나다에서는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우리의 잔고를 보여주고 한달치 보증금을 미리 내면, 언제나 프리패스였다.
연방이민에 합격했다는 것은,영주권 받은 후에는, 직업유무, 직종, 직함의 자유를 갖게 되고, 캐나다 그 어떤 주에서도 살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는 뜻이고, 우리는 자유롭게 여러주를 경험했다.
이민 온 직 후, 첫 몇년간 나는 기성품처럼 행동했다. 일찍 결혼해서 나는 20대 중반이었지만, 대부분 한국인의 평균 결혼연령과 출산 연령을 고려해 나의 첫째 아이 나이를 기준으로 나보다 10살씩은 많은, 30대 중반이신, 먼저 결혼한 주변 언니들을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의례, 누구나 하듯, 나 또한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학교와 동네를 찾아다녔고, 정보수집을 위해 정보가 많은 사람들과 친구하려 했다. 영어학교보다는 기왕이면 프랜치 이머전에 보내서 아이에게 이중언어교육, 최대한 많은 것을 주려했으며, 나 또한 이 곳에서 살려면 영어를 잘해야했으므로 매일매일 영어책을 읽으며 한국이라 주로틀리는 장단모음, 끝소리, 몇 개의 자음 발음교정을 시도 했다. 과거 한국에서의 경력과 학력을 인정해주는 곳에 취직했고, 일했다. 다행히 우리가 갖고 있던 돈이 1.5배가 되었고, 그 후 투자 수익에 의해 2배가 4배되고 6배되고, 10, 11....(원금 100원. 미움질투금지) 과정을 거쳤기때문에 금전적 어려움이 없었다.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된것은, 현실적으로 캐나다에서 나의 행동과 생각과 느낌에제약을 줄여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금전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럴 수록 주변사람들과 인식의 격차가 벌어짐은 나의 운명이었다. 비슷한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기에, 누구나 우리부부처럼 산다는 전제하에 대화를 하려고 진심으로 다가가면, 일단 내 나이가 자신들의 나이에 비해 한참 어림에 놀란다. 그 후엔, 한국 사람들이 의례 자신보다 한 두살이 아닌, 열살 어린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자, 사적 관계에서까지 자신의 태도를 교정해야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우리 부부의 나이 차이에 놀라고 (지금이야 대여섯살 어린것은 차이나는 측에도 끼지 않지만, 15년전에는 부부가 일곱 여덟살 차이가 나면 사실 좀 흔치 않다는 인식이 있었다.),각 가정 사이에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의 집에 있는 경제적 어려움의 격차가 있고, 그에 따라 생활패턴, 하루를 보내는 방식, 각 가정의 비표면적인 장단기 목표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민 사회는 한국에서 끼리끼리 모여 살며, 지역과 커뮤니티를 이루는 형태와 아주 반대로, 같은 한국말을 쓰는 한국 사람이라도 겹치거나 비슷한 조건을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든 여기서든 사는 동네가 비슷하면, 성격이나 가치관 등 한국에서 살아왔던 방식이 아주 달랐고, 아이 나이가 비슷해서 친구될까 싶으면, 양육방식이 달라 아이를 키우는 동안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웠다. 한두번, 세네번의 어프로치를 했지만, 남편끼리도 공감대 형성이 어려웠고, 상대가 자신의 상황을 나와 비교하고, 질투하는 것을 견디며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단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에게 무조건 나를 맞추며, 불편하고 거짓된 상태인 나를 위장하는것에는 한계가 있었다.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포장하지 않아 당연히 그렇게(자신의 예상대로) 살거라 생각하고 우리를 대하지만, 나중에는 뭐가 진실인지 모르게 되어, 나의 말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굳이 믿어달라 애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나는, 내 스스로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매분 매초 mm단위로 조절하고 있는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의 다름이 우리가 가까이 지내는 데 변수가 아니라, 내 성격이 원래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되는 나름대로의 규칙이라고. 그런 성격하에서는 '나는 나 이지, 나와 비슷한 '우리'라는 사람들의 집단을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과감하게 결정 내렸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아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나'와 잘 지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철저히 혼자가 될 줄도 알아야만, 그들과 재미있는 관계를 맺고, 건강한 이민생활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었다.
오로지 나와 운명을 함께하는 내 남편, 내 아이들이 전부인데 가끔 남편과 불협화음을 낼 때에도 마음 둘 곳 희박한 이 추운 겨울 긴 외국에 나와 세살 빵살, 네살 한살 그런차이가 나는 연약한 어린아이들을 감싸고 보호해야하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 운 적도 많다.
한국은 막 배달의 민족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지만, 이 곳 캐나다는 배민도 없다. 캐나다에서의 외식은 금방 질리고, 품질이 내가 한국에서 즐기던 것과 차원이 다르게 낮으며, 입에 맞지 않는다. 이는내 스스로 우리가정 전속 요리사를 자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요리가 귀찮고 힘든 순간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나 혼자 모든 부담을 안고 전 식구의 뱃속을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오는 것 같다. 자기 일이 아닌 듯 손을 내려 놓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손내리고 입만 벌리고 내게만 기대한다는 그 생각. 그럴때에는 남편을 불러 고기를 뒤적여달라, 오늘은 초밥이랑 컵라면을 먹자, 외출하고 오면 나는 에너지 없어서 밥 할수 없으니 다 해결하고 들어가거나, 간단하게 먹을것 준비해서 들어가자고 말한다. 결혼 후 15년이 지난 이제야,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내, 온 맘 다해 남편에게 한 시도가 이것이었으니, 삼시 세끼 직접 차리는 것으로, 나의 중증이상의 피플 플리져로서의 댓가를 15년동안 치룬 것이 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었던 지대한 계기가 되었음을 인식하는 지금이다.
내가 나와 남을 위해 요리하기 좋아하는 것을 호구행위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 감정이 어떻건, 가족을 위해 매번 정성을 쏟는 행위는 숭고하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은 날, 에너지가 없어서 도저히 요리할 수 없는 날, 외출했을 때, 그럴때에도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는 상대를 오만하게 만든다. 남편의 특성상 확실한 원인을 들어 내 입장을 설명하면 충분히 수용가능하고 조절가능한 사람인데, 내 권리를 지키려 내 스스로 상황에, 상대방에 맞설 수 없던 것이 원인이었는데, 상대가 당연히 내 입장을 알아서 알아주길 바랬다든가, 남편이 자기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스트 등 인격장애자라서, 어리고 힘없는 나를 역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이기적인 인간이어서 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나를 반성한다. 맘대로 오해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를 괴롭혔으므로, 힘든 생각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은 나 자신에게 사과한다.
사실 남편의 암묵적인 푸쉬를 배제하고서도, 누군가가 나에게 청소냐 요리냐 묻는다면, 원래부터 요리파이긴 했다. 캐나다에 와서 어린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어야할지 고민했고, 간식으로 무엇을 주는 것이 맞을지 항상 생각했던 것 같다. 늘 아이들만 우선으로 챙겨 자칫 서운할 수 있는 남편을 위한 간식도 이따금씩 잊지 않고 꼭 만들어주었다. 재스퍼에 놀러 갈때는 러스크를 만들어갔는데, 아직도 남편은 '제스퍼 가서 뭐 먹었지?' 하며, 내 마누라 인증확인하려고 '러스크' 라는 답가가 나오길 기대하며 내 얼굴을 본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다행히도 노력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잘 먹고 잘 컸다. 공기 좋은 곳에서,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준 자연식만을 먹으며 잘 먹고 잘자서인지, 큰애는 한국에서 갖고 온 아토피도 캐나다 생활 6개월만에 씻은듯이 깨끗하게 나았고, 둘째도 태어나 곧장 걷고 뛰고 말했다. 큰 아이는 항상 조금 예민해서 맘에 들지 않는다고 칭얼 댈 때가 많았는데, 작은 아이는 순해서 깜짝놀랄 지경이었다. 언제나 빵빵한 두 개 볼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며, 반짝이는 두 눈으로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누가 봐도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 무난히 적응하고, 신체적으로나 인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잘 지낼 준비가 되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당장의 불행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결국 행복으로 치환되는 경우가 있고, 당장의 행운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결국 인식하지 못해도 불행을 불러오는 경우들이 있다. 외로웠기에 혼자가 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에게 가치로 변환되어 인사했다. 당장의 행운이라 생각하는 요소가 차선이 아니라 차악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애나 나 자신이나 타인이나 함부로 가치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이 인간의 한계 그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시시하고 공허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느끼는 요즘이다.
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선생님은 내게 긴급 호출을 했다.
무슨일 때문일까?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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