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육아, #게임, #좌절, #캐나다이민, #육아
컴퓨터 게임, 이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한국의 거의 모든 부모님들의 공공의 적이다. 한국은 전세계적으로 인터넷 사용량이 가장 많고, 게임 중독의 수도 가장 많고, 인터넷 속도고 수퍼 빠른 그런 온라인 강국이다. 캐나다도 뭐, 15년 전, 그보다 더 이전에는 웹페이지 한 장을 넘기는데에 하루가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캐나다는 한국의 인터넷속도와 별 차이가 없다.
나는 게임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시간통제력이나 자기절제가 부족해 게임에 빠져 꼭 해야할 것을 못한다면 문제인 것이지, 게임 자체가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게임에 푹 빠진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게임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막상 게임을 해 보면 밖에서 보는 것만큼 게임은 마냥 해롭고 잔인하며 꼭 해야하는 공부나 현실세상에 반하는 그런 은둔자를 만드는 무시무시한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목표를 달성하기위한 전략을 연구하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 룰을 스스로 정복하면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나름대로의 치트키를 남몰래 획득할 수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게임을 잘하고, 원칙을 알고 있으며, 자신보다 높은 점수를 낼 수 있고, 누구보다 게임하는 순간 게임에 푹 빠져 있는, 그러나 할당된 게임 시간약속을 준수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쉽지만 아무렇지 않게 다음 할일에 몰두할 수 있는 부모만이 아이와 게임간의 관계를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밌다. 그 재미있는 것을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하나.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의 기준에 맞춰야한다는 알수 없는 강박적 태도로, 머리 좋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았으며 쉽게 접근가능한, 인간의 삶의 낙을 억지로 제거할 필요가 없다. 애들도 그렇다. 다들 시험관 시술이니 냉동이니해서 아이를 가지려고 아우성들인데, 우리집에 있는 복덩이의 독립까지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서로 욕하며 채근하고 비하하고 헐뜯고 싸우기보다 재밌고 귀하고 값지게 소중하게 쓰는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들들이 게임에 몰입하는 이유는 학교나 학원, 가정환경 등 일상에서 겪는 좌절 때문이라며 여자로 태어났기에 아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게임을 모르는 엄마들의 가슴을 한번 더 후벼파는 어느 남자 선생님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첫째로, 인간은 누구든 삶의 어느순간에든 전지전능한 신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누구도 좌절(frustration; 맘처럼 계획하는대로 인생이 따라주지 않는 데서 오는 실망감, 나도 모르게 손이 툭 떨궈지는 길 잃음, 후에 곧 찾아오는 혼란스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아직 자신의 어린시절 상처의 특수성에서 빠져있음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시고 계시는 듯 하다. 그래서 처리되지 않은 감정상태에 본인이 갇혀 계시다는 것을 모르시기에, 본인이 아들 엄마들을 앞에두고 하시는 말씀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시는 듯 하다. 남들이 보통이라 여기는 조건과 다른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좌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불완전한 삶이야 말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요즘 육아에서 강조하는 그 '좌절' 이라는 것을 과대 평가하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짐을 경험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게임은 도무지 회복불가능한 좌절감으로만 삶이 뒤덮힌 루저들의 전유물이라는 비하와 달리, 사실상 완벽한 조건에 살고 있을 법한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삶의 모든 여정에는 좌절이 빠질 수 없고, 아무리 좌절을 겪어도 전원버튼 하나만 리셋하면 아무렇지 않게 다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데서 혹은 '죽었네, 죽었어, 망했네, 망했어' 하는 90% 망한 순간에도 의외의 돌파구를 찾아내며 극복해내는 순간에서 아이들은 '좌절도 압박도 별거 아니네, 다시 시작하거나 이겨낼 수 있네' 하는 현실삶에서의 돌파구, 회복탄력성을 배우게 되며,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주는 좌절감 혹은 압박에 의연해 질 수있다.
아이보다 먼저 인생이라는 게임을 즐겨온 부모가 그 순간 어떻게 개입하냐에 따라 아이와 본인의 좌절 혹은 압박에 대한 민감성을 낮추고,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도전에 무던해 질 수 있다. 삶의 불안을 낮출 수 있다.
'좌절' 이라는 말과 '게임' 이라는 말을 연합시켜, 마치 세상 모든 알파남들은 '게임'을 할 필요가 없으며, 현실에서 뭣도 안되는 것들만 '게임'으로 자신의 좌절감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은, 게임을 모르는 엄마들을 아이에 대한 오해로 이끌며, 이 생각이 가뜩이나 현관문만 나서면 정글인 세상을 사느라 정신차릴 새 없는 아들의 자존감을 한번 더 죽인다.
그것 보다는, 삶에서 겪는 좌절은 신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나 당연한거야, 누구도 '언제나' 최고가 될 수는 없지, 그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거지, 너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너를 항상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야, 네가 느끼는 약점들이 너를 좌절시킬 때도 있지만 강점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야. 너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니까, 이것봐! 하며 자신과 아이의 강점을 발견하기 위해 애쓸 기회와 동시에 약점을 인정하고 건강하게 공존할 기회 마저 빼앗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둘째로, 본인이 게임을 잘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한 게임을 독파하기위한 규칙은 그 어떤 게임이든 빠짐 없이 존재한다. 게임방법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방법을 촘촘히 읽고,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며, 메타인지를 십분 활용, 그것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시작한지 이삼십분만에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의 다름은 중요하지 않다. 시도여부야말로 상당한 차이를 빚어낸다.) 게임 룰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것이 쓸모없다고? 학교 공부또한 마찬가지다. 수학문제가 되었든 과학이 되었든 국어가 되었든, 항상 모든 문제에 대한 독해는 '출제자의 의도'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문제 그 자체에 압도당하는 사람이 아닌, 할당된 각 문제의 숨은 진가를 찾는 연습을, 4점짜리 수학문제들 보다 수준 높고 정교하게 설계된 게임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만큼 하며 머리를 단련하는 것이 루저인가? 그것이 루저라면 게임보다 더 복잡한, 나에게 도전과제가 될 수 있는 숨은 뜻이 담긴 문제를 당신이 한번 줘 보시지?
나의 둘째 아들은 3살때부터 체스게임을 했고, 나는 아이의 수준이 어느정도일까 시험하기 위해 항상 아이의 바로 전 수에서 조금씩 져주다가 어제 11살이 된 아이와 함께한 다른 게임에서는 가족 4명의 게임에서 최대 점수를 낸 둘째아이보다 딱 2배높은 점수로 게임을 중도하차했다. 아이의 도전 의식을 자극함과 동시에 나 자신과의 게임지속 약속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의지의 한국인이라며 노가다로 점수를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저 멀리서 빈정대는 사람의 말과는 별개로 짧은 시간안에 높은 점수를 내려면 아주 조금만 머리를 쓰면 된다.
그리고 그 룰은 나만 알고 있을 때 빛난다. 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