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을 통한 자아 해방, 새로운 시작, 작은 도전
가장 쉬운 것 부터 시작하자.
진짜 나로서의 삶을 위해.
거울을 봤다. 허리춤까지 길어진 자연갈색의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보였다. 긴머리만이 여자로서의 정석이라는 가르침은 누가 내게 심어놓은 것일까. 살기 위해 재빨리 어른이 되어야했던 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어야했다. 내가 속했던 사회는 누구나 인정하는 아름다운 여자만이 행복할 자격이 있음을 어릴 때 부터 똑똑히 지켜보게 하는 곳 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뭐니뭐니해도 여자로 생존하기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다움의 제 1의 조건으로서 긴 머리카락이라는 변수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니까... 얼굴은 몸매는 키는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나 머리카락 길이만큼은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헤어스타일 중에서도 긴머리는 단연 예쁨의 제 1조건이었다.
나는 머릿숱이 엄청나게 많다. 러시아 연해주 출신의 아이누족 모계혈통때문일까. 헤어가 약간 지나치게 풍성한 것이 전형적인 한국인과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 반곱슬의 풍성한 머리가락을 가진 내가 가장 쉽게 연출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은 모두 뒤로 묶어 말아올린 번헤어, 일명 똥머리였다. 볼록한 이마, 갸름한 얼굴만 튀어나오게 만드는 이 스타일이 10대나 20대때에는 꽤 잘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30대 후반이 되자 점점 실증이 나던 참이었다.
물론 남에게도 내 머릿카락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을 수는 있다. 이따금씩 머리를 묶지 않고 실수로 밖에 푸르고 간 날이면, 주변인들은 모두
"캔디야 너는 머리 절대로 묶지 마, 너의 머리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라고 말했지만, 내가 그 말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이 전에... 중학교 시절 강제 단발 귀 밑 3cm때의 추억과 관련이 있을까.
머릿숱이 보통 사람들의 1.5배이상, 그리고 머릿숱이 적은 아이들의 2배이상 되던 중학생 캔디는 사춘기 호르몬때문인지 머리가 유난히도 붕 뜨고 곱슬거렸는데, 늘 내 바로 뒤에 앉은 아이는 내 뒷머리의 돼지꼬리같이 꼬불꼬불꼬불꼬불한, 일명 '지랄머리'를 뒷통수에서 뽑아내주곤 했었다.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고, 친절이자 배려였다. '그냥 묶어' 라는 말이 주변에서 남발했지만, 머리가 짧아서 묶어 올리기도 어려웠던 시절, 처음엔 한 두 가닥의 지랄머리를 내 머릿통에서 뽑아 내게 주던 뒷자리 아이 '금스란'은 이 행위에 어느새 재미가 붙었는지, 나중에는 아얘 지퍼백을 집에서 가져와 내 머리를 한 움쿰 집어가던 기억. 그래서 나중에 시험을 잘 보겠다고 다짐한 기억, 한 아이가 두 명 세명이 되던 기억이 떠오른다. 뭐 이것까지는 괜찮다. 본인들의 행위로 애들은 그토록 원하던 시험을 잘 보고, 나는 덕분에 삼각김밥같은 내 머리가 조금은 차분해지리라는 기대감 선물을 받았으니깐...
그 무렵 내 절친은 유난히도 찰기름 흐르는 머릿결을 가진 아이였다. 머릿숱이 적은것이 본인 나름대로의 스트레스였지만, 나의 2X 머릿숱에 비하면 걱정거리도 아니었을거다. 늘 아침마다 고데기로 머리를 펴고, 찰진 생머리를 유지하던 그 애. 나 자신을 꾸미는 사치를 감히 누려본 적이 없기에 난 늘 이렇다할 대책없이 머리만 제때 감으며 삼각김밥에겐 감옥 혹은 지옥이나 다름없던 '강제 3cm'가 지나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 당시 집 주변 미용실 언니는 내게 늘 '매직'을 권했지만, 매직 스트레이트 열펌을 하며 발생하는 단백질 타는 지릿한 똥냄새가 나는 싫었으며, 더 큰 이유로는 펌으로 내 옆 친구랑 비슷해지려고 하는 내 태도가 들킬까 자존심 상해, 그냥 이... 따만한 머리로 꼬박 3년을 버티던 그 시기. 중학교때를 생각하면 나의 2X머리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 미모의 암흑기.
이 시기를 넘어 두발자유가 주어졌던 고등학교 시기가 되자마자 바로 번헤어, 일명 똥머리로 넘어가 38살까지 나의 주된 헤어 스타일은 똥머리였다.
내 성격적, 감정적 억압이 느껴지는 가장 큰 신체부위는 바로 다름 아닌 헤어스타일이라는 생각에, 내 발걸음은 미용실로 직행했다.
단발로 싹뚝 잘라주세요.
오랜 고정관념과 맞서는 순간이었다. 긴장이 맴돌았다.
"네? 손님, 단발로 자르시면 너무 많이 머리를 자르는 것 아닐까요?"
머리카락이 엉덩이에 달랑말랑하게 길어진 나를 보며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은 황당해하시며 내게 대답하셨다.
머리카락이 짤려나가는 동안 나를 비추는 미용실 거울을 뚫어지게 볼 수는 없었다. 어색함을 느낄 나 자신의 어색함을 마주하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 거울 속에 있는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손님, 손님은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계세요. 숱이 많은 편이라 단발머리로 잘랐을 때에 볼륨이 아주 잘 살아날 거에요, 두피도 깨끗하고, 와, 이것보세요. 이제보니 단발이 잘어울리시는데요?"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의 말씀은 정답이었다. 사춘기 호르몬에 의해 구불거리던 머리카락도 옛말이었다. 오히려 반곱슬의 머리는 머리손질을 쉽게 했고, 풍성한 머릿숱은 약간만 드라이로 연출해주어도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다. 얼굴이 동그랗지 않고, 오벌형이라 긴머리만 어울릴 줄 알았는데, 머리를 짧게 자르니 오히려 얼굴이 위에 붙어있듯 탄력있어 보이는게, 따분하거나 지쳐 보이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 보였다.
뭐야, 그동안 약점인 줄로만 알았던 2X머릿숱이 최대 장점이자나?
작은 도전과 행위하나로 20여년간의 의식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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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행동 하나가 20년 그 이상 묶였던 나 자신을 풀어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