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식에서 비롯한 슬픔, 패턴을 끊어낼 결심, 자기위로와 회복의지
더 못생길 용기, 더 무능력할 용기, 더 속이 좁을 용기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일히 세어보자 한다면 수도없이 많겠지만, 위 세 가지 용기는 내 삶의 거의 모든 문제의 해결에 직통하는 필수사항이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먼저 끌어낸 건 지난번 화에서 풀어낸 못생길 용기였다. 이미 20대를 수년 전에 마셔버린 아줌마이기 때문에 그리고 외모에 덜 민감한 다문화사회인 캐나다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당신의 오해이다. 아랫배부터 쭈욱 끌어낸 본연의 의지 '용기'에 더한 '나이듦'이 그리고 '아줌마 됨'이 흠없는 어른이되고자 했던 나의 무의식적 강박의 사슬을 짤라내어주기 조금 더 유리한 스케폴딩을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겠지만, 어린나이에 유부녀가 된 나로서는 누구도 내 현실의 자아를 알아챌 수 없도록 항상 그와 반대로 더 날씬해야하고, 피부가 더 고와야 했고, 피 말리는 가혹함으로 나를 대하며 30대 후반인 지금도 언제어느때라도 불러만 준다면 미인대회에 출전할 기세로 살아왔으니까. 나 자신이라 정의하던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외모의 변화는 내면의 변화를 이끌었다.
외적 껍질을 벗어버리자 내면의 껍질 또한 벗어지는 기적이 벌어졌다.
인간관계에서였다.
나는 남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든 늘 상대에게 불순물을 섞지 않은 온전한 순진함으로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행동했고, 늘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해 주며 상대에게 절대 상처주지 않으려했다. 내가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를 먼저 배려한다 수준이 아니라, 상대에게 정성을 다하느라 내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나의 입장, 상황, 기분, 생각은 완벽하게 지워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난 이 행위를 당연히도 '공감능력' 이라고 이름 붙이며 살던 중이다.
나의 이 착함이 오프라인에서만이었다면 서로들을 의식하느라 반응을 조절하는 탓에 문제의식의 속도를 늦췄겠다만, 요즘 주요 커뮤니케이션의 장 오픈 카톡방에서도 지속됨이 문제 인식의 촉매제가 되었다.
"카톡, 굿모닝"
"꿀모닝"
"쫗은 아침"
"상쾌한 하루보내쟝"
모두 다 내가 매일 아침 카톡오픈방의 회원들에게 쏜 메시지이다. 처음에는 이제 막 대화방 참여자인 내가 부지런히 보내는 메시지에 모두 다 나의 아침인사에 기다렸다는 듯 답장을 보냈다.
"안녕, 언니, 일찍일어나네!"
"안녕 캔디, 좋은하루"
점심이 지나고, 하루 일과마저 마친 저녁식사후에는 하루동안 쌓인 카톡메시지를 벽타기하며,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그들이 탈탈 털어놓은 육아고민 메시지에 선경험자이자 현업 종사자 그리고 전공자로서 다소 전문적이고 경험적인 생각과 느낌들을 나눠주었다. 철저한 샌드위치 화법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해가며 말이다. 모두들 혼이 담긴 나의 의견에 감사를 표현했고, 나와 말하려 내가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기는 시간에 일부러 맞춰 대화방에 들어와 삼삼오오 순번을 기다려 자신을 위한 실시간 상담을 원했다.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원하는구나, 나의 경험이 타인에게는 자양분이 될 수 있구나, 나도 아이들이 어릴 때, 이렇게 단체 카톡방이 있었다면 해외생활에서 덜 답답했겠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며 내가 지난 해외생활 십여년간 목말라하던 조언과 위로를 상대들에게 대신 건냈다.
그러길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대화방 속 모두의 포지션이 점점 굳어져갔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 아침인사를 건내며 카톡방에 존속하는 친절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누가 뭐랄 것 없이 고민수용자이자 해결사 역할은 당연히 내 몫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한 두번 그들의 질문을 건너뛸때에는 오해를 받아야했다. '언니는 나만 미워하나봐, 사람들 앞에서 내 메시지만 씹는 사람'...
슬슬 내 마음에 부담이 되는 동시에 전체기류에 오해가 쌓여갔다. 그리고 기류가 불리해지면 불리해질 수록 오해를 해결하고자 더욱 더 카톡방에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상담메시지를 저장하기 위해서일ㄲㅏ... 카톡 메시지를 저장하고 있다는 메시지까지 카톡측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나는 단톡방 고정멤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웠고, 상담사를 자처하며 역할이 굳어진 나머지 정작 입장을 바꿔 나의 외로움이나 사춘기 아이들을 캐나다에서 키우면서 겪는 갈등과 어려움을 공감해주고 위로해 줄 사람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물론 나의 정성에 고마워하는 사람도 존재했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겨감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심리학의 대가 Carl Jung은 친절함의 오류를 말한다. 한 사람이 공감해주고 친절하고 진심으로 상냥함을 대중에게 주었는데, 그 친절을 받는 대중들은 정작 친절공급자를 혐오한다는 그의 설명은 나의 성인이 된 이후의 인간관ㄱㅖ의 여러 측면을 설명해주기에 충분해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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