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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귓속말로 쉬쉬하며 서로들 하는 말 중에 '그림자(그늘) 져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흔히 말하는 건강하고 원만한 환경에서 자랄 수 없었던 아이가 갖게 되는 성격적, 인성적 문제와 전인적 발달의 미제는 물질도 명예도 초월했다 주장하며 '사람을 중간 이상 꿰뚫어볼 수 있다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사람을 가르는 그릇된 기준 중 하나이다.
위 말에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 세상의 모든 빛은 그림자를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존재는 눈으로 식별가능하므로, 빛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림자이기도 하다. 빛이 강할 수록 그림자 또한 짙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ㅇㅖ외가 없다. 그림자를 숨기는 사람은 있어도, 그림자가 없는 이는 없다. 스스로의 그림자에 수치스러워 함은, 그것을 숨기고자하는 이가 감당하는 인생의 무게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Carl Jung은 이 그림자 개념에 대해 세상에 설명한 사람이다. 그는 그림자란,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무의식 속에 밀어둔 자신의 성향, 욕망,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부분임을 은연중에 알고 있지만, 끝내 인정이 힘들어 아무도 보지 않을 빛 뒤에 가려지도록 숨겨놓은 상태의 것.
이를 의식적으로 인식해 빛과 함께 통합하려 노력하는 태도가 자존감이 높은 것이며, 반대로 그걸 자기 안에서 보지 않고 타인에게서만 보려고 하는 '투사'의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이 사람간의 싸움 원인이라는 거다.
즉, 문제는 본인 안의 것인데 '너 때문' 이라 믿어버리는데서 생긴다. 스스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평형성에 약간이라도 균열이 갈 까 두려워, 사람을 피하거나 미워하는 것. 이것이 미성숙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라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아이들이 그림자투사의 주요 희생양이다. 이런 환경에서 큰 자녀들은 후에 스스로의 그림자를 통합하지 못하고 나에게 던진 자신의 부모를 '인격착취자'로 기억함에 틀림없다. 열 두살배기 어린 아이의 터져나오는 가슴몽우리와 오리궁둥이에 자신의 성적 욕망을 투사해, 남자 밝히는 기집애라 말한다던지, 자신의 뚱뚱함이 싫어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살찌는 것을 혐오한다던지, 공부 잘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에 아이 성적에 강박을 보이며 바보취급한다던지 하는 예들은 한치도 아이 스스로에게서 나온 감정이라 설명할 수 없는, 부모의 투사된 감정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완벽한 빛과 그림자 통합을 이룰 수는 없다. 그 빈도와 고착된 투사패턴을 문제시 하고자 한다.
모두는 빛과 그림자 동시에 동반하므로, 그토록 지우고 싶고, 들키기 싫은 그림자, 이를 갖고 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있다. 나는 아무문제 없는 사람이라며 눈 똑바로 뜨고 자신의 투사행위를 정당화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림자를 아프지만 받아들이며 내면안의 빛과 함께 통합하며, 그 전체가 나 임을 인정할 것인지가 변수이다.
요즘 육아계에서는 '결핍'이 트랜드인가보다. 너도나도 아이들에게 넘치게 주지 말고 결핍을 주자고 아우성들인데, 정작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한다는 것이 무슨의미인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무시당할 두려움에 무조건 남보다 좋은 차, 좋은 직업, 좋은 집을 가져야한다는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결핍'의 선물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일,집에서 초월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오롯히 바라볼 용기가 있는지, 자신의 부모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지,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생존한 사람에게 내 그림자를 던져대며 혐오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묻고 싶다. 자신의 그림자를 아이에게 무자비하게 던져놓고 '너에게 결핍을 줘야 한단다' 하며 무심코 악용하는 이들은 없을거라 믿는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받으며 성장해 성격적 흠이 없는 아이로 만들어보자는 추진력은 애정결핍을 가진 부모의 판타지일 뿐이다. 부족한 것 없이 성장해 구김살 없는 며느리를 얻고 싶은 건,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 박차를 가해 더욱 힘든 세상살이라는 진실을 부정한, 그저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부족한 환경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시어머니의 새 사람을 향한 그림자 투사일 뿐이다. 애초에 그런건 없다. 빛이 강할 수록 그림자 또한 짙기 때문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며 사는 것이 괜한 힘낭비는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아이를 키울 때에도 그 아이가 후에 자신의 그림자마저 인정하고, 수용하고, 빛과 함께 통합해 '이 또한 나야' 라고 당당하게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함이 어떤 직업을 갖든, 어디에서 살든 행복하고 당당한, 독립된 사람으로 키울 해답이지 싶다. 그저 두려움에 차, 내 아이에게는 그림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보다는 , 내게 있는 그림자를 남보다 먼저 스스로 독해해 낼 줄 알며, 그것을 없애려고 하거나 남에게 던져버리려 하기보다는 꾸준히, 그리고 오롯이 지키며, 탐구하며 돌봐주고, 성숙에 다다를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도 아무 문제 없음을 가르치는 것, 내 단점, 아픔, 인정하기 싫은 면을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세상을 강하고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는 어른으로 내 아이가 크길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내 부모가 하지 못한 것' 이라는 칼 융의 말 또한 빌려보려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수용하지 못하는 부모에게서 큰 아이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자신의 그림자를 수용하는 것이다. 부자 부모에게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시도조차 못해보고 죽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듯, 성실한 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에겐 게으름이 가장 어렵고 무거운 짐인 것과 같다.
2년간 마음 글쓰기를 이 브런치 사이트에 지속하고 있다. 감정이 담긴 글을 꾸준히 쓰며, 나는 나의 아픔을 직면하며 매우 고통스러운 동시에 나에 대한 진정한 수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욕하지 않는 마음의 눈을 얻게 되었다. 화려한 사람들에 대한 무의식적 부러움마저 전멸하며, 세상의 잣대를 초월해 스스로의 주관대로 멋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매력을 발견했다. 사회적 옳고 그름, 전문가 권력에 ㄷㅐ한 신봉, 편견따위는 없어진지 오래이다. 마음 글쓰기는 사람을 바꾼다. 어둡고 눅눅하고 칙칙하고 솔직한 글일 수록 더욱 그렇다. 위의 글에서 언급한 '자신의 그림자 수용과 통합'에 완전히 그리고 빠르게 가까워진 느낌이다. 어두움을 감정과 동일시 할 필요가 없다. 그림자를 약점과 같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고는 우대하고 감정은 천시할 필요가 없다. 모두 소중하다.
세상에 단점 없는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런 인생도 없다. 장점이 큰 사람은 언제나 그를 위한 원동력이었던 단점도 크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다. 그리고 시원하다.
결국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최고의 교육도 훈육도 유학도 이민도 심지어는 아이를 위한 이혼도 재혼도 입양도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힘이다.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언제나 동반한다는 사실을 내 몸 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빛을 추앙해도 상관없다. 그림자까지 품어낼 수 있는 용기가 동반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