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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과 함께 단둘이 방과후 공부를 한지 딱 1년 반이 되었다.
큰아들은 현재 캐나다 고등학교 9학년에 재학중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매니토바주는 위니펙이라는 주 시 브랜든 등 제 2-3의 도시들, 그리고 그 외의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타 도시에 비해 월등히 지역별로 학생과 학급 그리고 학교 편차가 극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원주민 보호구역 없는 캐나다에서 몇안되는 도시이며(체제는 맘에 든다. 말로만 보호이지 격리이며 사육 그리고 이민자와 정복자들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일종의 폭력이니ㄲㅏ...) 도시안에서도 빈부격차가 심하고, 애석하게도 한국과는 다른 문화에 의해 학력편차도 심하다. 한국은 잘살건 못살건 일단 애들만은 열심히 공부를 시키자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이 곳은 그런 공통문화가 없으니, 대부분이 부모 생긴대로 살고, 속된말로 일종의 개룡이가 전혀없다. 모두가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말하지만, 그런면에서 한국은 모두에게 길이 열린 어떤면에서는 심히 평등한 아이러니 한 곳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때는 공부라는 것을 딱히 할 것이 없는게, 아직 아동의 발달 수준상 높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베이스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깊고 울퉁불퉁한 고랑이 생겨야 그 안에 물이 차 오르는데, 아직은 평평하고 밋밋하여 그 안에 채워 넣을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라리 이 시기에는 삽질을 하고, 외상을 입혀 자신만의 고랑이 생길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여러가지 세상의 좋은 것을 경험할 기회와 어두운 것을 힐끗 볼 기회 그러면서 대화를 통해 자기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었다. 한마디로 가족 여행다니고, 맛있는거 먹고, 싸우고 신나게 노는 것 말이다.
그렇게 7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하자, 선생님은 나를 불러놓은 자리에서 내 아이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능성이 많은 아이를 학업적으로 방치해도 되겠냐는 말을 각 담임으로부터 3년째쯤 듣자, 아이 마음속에는 공부에 대한 필요성이 납득되게 된다. 굶겨야 배가 고픈모양이다.
타주 대도시에는 여타 사교육이 존재하지만 이 곳에는 그리 스타 강사의 명강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내가 엄마라는 책임으로 명강사가 되야하는 순간이다.
초등, 중등, 고등 전학년의 커리큘럼을 분석한 후 수학학습지로 유명한 교재를 구입해, 단원별 관계도를 병렬적으로 나누어, 그다음 학년별 난이도에 맞추어 수직적 계획을 짰다. 아이가 제발 공부를 시켜달라는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볼 때 쯤, 단원별 테스트를 해 보았고, 코비드가 시작되었던 4학년 무렵부터 아이의 학습에 결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전까지 아이는 프랜치 이머전이라는 영불어 교육을 동시에 받아왔기때문에, 또 책읽고 글쓰는 것을 좋아해 어휘력과 문해력은 좋았지만, 수학만큼은 보충학습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약 1년 반동안 학년별 공부가 아닌 단원별 공략으로 초등 6학년 전과정 그리고 현재 9학년 과정까지 모든 과정을 마스터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마스터는 단순히 단원공부 진도를 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나에게 설명하고, 문장으로 되어있는 사고력 문제에 대응해 스스로 식을 세우고 풀이과정을 입과 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막상 아이와 공부를 진행해보니 다수를 대상으로 혼자 가르치는 1타 명강사 역할만으로는 부족했다. 옆자리에 앉아 아이의 사고과정을 지켜보고, 수정해주며, 사고의 전개방식을 체크해주고, 스스로의 노력과 길에 확신을 갖을 동안 수도 없이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과정을 옆에 앉아 돌보아주어야했다. 단순히 문제집과 계획표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내 시간과 내노력을 태워야만 했다. 밀어붙이거나 채근하지 않고 혼내지 않고 쫀득하게 아이와 밀땅이 가능할 만큼 내가 정서적으로 든든하게 역할할 수 있어야했다.
한국 수학은 어렵고, 캐나다 수학은 쉽다고 하지만, 캐나다 수학은 약 1학기에서 1년정도 한국에 비해 진도가 늦은반면, 내용을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70점을 넘을 수가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없이 내신성적으로 대학을 가는 캐나다의 사정상, 아무리 자신이 없는 과목도 90점대 초반은 받아야 Univerrsity of. 라고 불리는 전국 8대 대학에 입학 할 수가 있다. 국제 학생들에게 알려진바와 다르게, 캐나다는 지역대학간 입학점수 편차가 없으며, 어떤 지역의 어떤 대학이라도 일단 들어가고 난 후에는 한국의 일류대학들과 비교, 전투 과정이 비교적 험란하다. 대학 이야기는 다음에...
하루 1시간의 방과후 학습으로 9년간의 진도를 1년 반동안 나가게 한 것에는 아이의 9학년이라는 지적 성숙도와 나의 전략적 접근이 합을 이뤘다.
한국으로 따지면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내용이 뭐가 대수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두자릿수 곱셈부터 헷갈리고, 루트는 전혀 몰랐던 아이에게 모든 개념을 이해하게 하는데는 아이의 상당한 집념과 노력이 필요하다. 도형의 부피와 겉넓이, 둘레 그리고 전개도를 이해하고, 스스로 앞뒤옆위아래를 정복하게 하는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더라. 그리고 지치지 않도록 에너지를 부어주고,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 지도자의 핵심을 꿰뚫는 간략하지만 정확한 설명이 필수이다.
엄마, 유노 왓,
오늘 학교에서 깜짝 쪽지시험을 봤는데,
내가 일등으로 시험지를 제출하고, 다 맞았어요.
수퍼 이지,
첫 고등학교 시험에서의 일등이라. 캬.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생애 첫 순간을 맞이한 아들이다.
장장 공부 1년 반만에 노력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 단맛을 보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공부에 아쉬움이 있어 내 자식만큼은 공부를 많이 시켜 세상의 모든 기회를 가득담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마음이 드는 엄마들과 반대로(혹은 마찬가지로) 나는 어릴 ㄸㅐ부터 어른이 되어야했기에, 공부를 잘해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아이는 공부를 시키지않아야한다고 마음먹었었다. 아이가 놀 수록, 누워서 티비를 볼 수록 내가 마치 자유를 얻을 것같아 행복했었다. 봐봐, 저렇게 놀아도 내가 사랑해주잖아, 아무도 푸시하지 않잖아, 그게 저 아이의 진ㅉㅏ 자존감이지... 하고 말이다. 그게 내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또한 위의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내 욕망이 투사된 접근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야했다고 해서 그 과거에서 자유롭고자 아이에게 발전의 기회를 제거해버리는 건 영역을 넘는 행동이었다.
허구의 독립으로 괴로웠던, 어른 아이였던 내게서 태어난 아이 또한 한 명의 인격체로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발전하고, 앞으로 나갈 기회를 가져야한다. 그것이 어린시절 어른스러워야했던 나의 사정과는 전혀 별개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의 우리 가족의 삶의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