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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크며 느끼는 감정, 해방 그리고 상실감

나는 예비 시어머니, 미래의 여성 노인 입니다.

by 후루츠캔디

애들을 예뻐하다보니 금세 임신 그리고 육아의 시간이 15년이나 훌쩍 지나있었다. 남편이 죽도록 우기는 한국나이로는 40세 그리고 캐나다에서 사는 내가 주장하는 만 나이로는 38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요즘같아서는 사십줄에 하는 출산도 그리 드물지 않은 사회적 상황에서 누군가의 눈에는 '벌써 끝나고 있구나, 나는 언제 거기까지 도달하나' 멀고 먼 길을 헤쳐나갔으며, 얼마 남지 않아 해방이겠거니 싶겠지만 당사자는 기분이 그리 달다구리 하지만은 않다.


해방이 먼저이면 상실감도 공평하게 먼저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뻗치는 젊음을 뱃속에 꾸욱 눌러버리고 태아를 키우는 동력으로 삼아야했던 사람은 그 잃어버린 젊은날이 불쌍하니 해방의 기쁨만을 주신다면 좀 좋아? 만 열다섯도 채 안된 아들이, 한국이라면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9학년으로 여엿한 고등학생이다.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간사함은, 프레임상 고등학생이라고 하니, 진짜로 빨리 아이가 커 버린 착시현상까지 느낄 참이다.


이 아이들이 지금까지 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내가 이만큼이나 용감하고 과감하게 인생을 끌어올 수 있었을까 싶고, 어떻게든 내 마음을 바로 잡아 때로는 살게 해준 장본인들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기도 했다. 물론 10킬로 그램에서 15킬로그램 나가던 1살 아이를 안고 다녀야만 할 때에는 팔과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고, 세살 배기의 저지레에 피가 거꾸로 솟도록 빡쳐오름을 참아누르며 참 고되다 느끼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내 삶에 차지하는 육중함 만큼이나 통통한 볼따구를 만지고 안아주며, 또 안기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의 따뜻한 하트가 퐁퐁 올라와 이렇게나 충만하게 나를 채워주는경험을 하기도했으니...다시생각해봐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가장 잘 한 일, 인간으로서 가장 보람되게생각하는일은 아이를 낳고기른일임에 변함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느낌은 무얼까. 아이들이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난 뒤,마음이 약간 텅 빈 느낌이다. 옆머리에 삐치는 새치 2가닥이 발견되어서일까. 아이를 낳기도전에 소속 나라를 바꾸기도 하는 일생일대의 변혁기를 거치기도했고, 결혼 후 육아중에도 나 자신을 위해(가족을 지키기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기도했지만 마치 20대의 내가 순간 삭제되고 30대는 내게 존재하지도 않았고, 다이렉트로 눈 한번의꿈뻑으로 40줄에 당도한 이 느낌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누군지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채, 나를 처음보았던 날, 시어머니의 뜨뜨미지근한 표정이 이런 느낌에서 온 것일까. 20대의 나는 단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라 생각했는데, 첫째 아이가 내 키를 훌쩍 넘고 욱씬욱씬 근질근질한 내 머릿통 사이로 새치가 삐치는 시기가되어보니, 이제는 아주 아주 조금은 인생무상이 무언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된 것 같다.

캔디, 입시가 아직 남았어, 상실감이라니 아직 이른걸...그렇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이런느낌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지는 않다. 유난히도 데이케어(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편 그리고 전공자로서의 부심으로 철저히 무장하던 나는 아이를 정규학교인 킨더가든에 입학하기 직전 4개월 동안만 하루 4시간씩 데이케어에아이를 맡겼었다. 첫 입소시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2-3살이나 훨씬 성숙 했던 아이, 또 다른 아이들의 반 절 시간밖에 되지 않게 반나절을 머무르게 했던 나지만, 아이가 데이케어에 가는 첫 날 나는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킨더날에도 그리고 초등 1학년에도 중등 1학년에도 똑같았다. 그 때에는 어떤 감정인 지 몰랐는데, 맞아 맞아 바로 그거다. 상실감. 조금 오바스럽다며 많은엄마 들의 동의를 얻지를 못했지만서도, 그리고 내가 특별히 좋은 엄마도 아니면서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펑펑 나왔다. 이 세상에 내 편은 너희 둘 뿐인데... 나만 바라봐주고 내 품에 안기고, 나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주는건 내 아이 둘 뿐이라는걸 외로움에사무쳤던나는 너무나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조금 그리고 조금 더 큰 학교에 입학할 수록 나의 상실감은 전환시점에서 꼭 한번씩은 증폭되어왔던 것 같다.


지나가버린 20대가 아깝다는 뜻은 아닌것 같다. 나도모르게 푹 빠져버린 순수한 볼때기 냄새에 취해서, 잔뜩 뛰어 놀다 엉망진창되어 들어온 너희 발에서 나는 고소한 땀냄새에 스며들어 중독될 즈음 되자, 애들 목에서는 굵은 목소리가 나오고 벌써 이미 벌써 나보다도 크고 용감한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들들이 아닌 딸 들이었다면 달랐으려나?


영화 '올가미' 나 '마더'에서 나오는 엄마가 그리고 세상 모든 몹쓸시어머니의 근원을 이전엔 유독 유별난 여성 몇몇이 갖는 정신병이리라 생각했는데, 나처럼 자기계발에 치중하고, 이보다 더 열심히 살 수 없는, 그리고 나와 상대의 감정을 살펴보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어김없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상실감]의 공통 분모가 원래는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변화의 시기에 느끼고 받아들여야 마땅한 [상실감]이라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자꾸만 ㅇㅖ전 어린 아들에게서 느낀, 지나간 감정을 지키려 아집한다면, 되려, 감정이 길을 잃어, 영화 속 여성들처럼 집착이라든지, 상대에 대한 분노와 배반감으로 번질 수 있으므로, 앞으로 내가 아이가 대학을가고, 여친을 사귀며, 결혼을 하며 느낄 [Big, Big 상실감]으로 향하는 예고편이라 받아들이고, 미리 경험하는 작은 상실감을 꼭꼭 씹어 잘 삼켜놓아야겠다.


이건 바로 찍먹 갱년기? 찍먹 빈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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