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들의 사춘기를 맞이하며
작은 아들은 정말로 귀엽다. 객관적으로도 얼마나 이쁘냐하면, 어릴때부터 동네 누나들 외투 주머니에서 놀았고, 아가놀이의 아가로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된 후에 애정결핍과 부모의 방임을 운운하는 바, 특별히 주변과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란 이 아이가 정작 특별히 노력한 것은 없다. 그런것도 다 지 복이며, 타고난 팔자이니 과히 스스로의 삶의 역사를 괴로워할 필요는 없나보다. 과거의 관계에서 오는 아픔에 불충족하고, 현재 또한 관계유지와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힘을 빼는 것이 맞는 전략같다.
오늘도 아가를 안아주러 아침에 아가 방에 들어갔다(6학년, 아직도 아가다.). 내가 침대에 스윽 들어가 아이를 안아주고 볼을 비비면 평소같으면 나를 안고 앙알앙알 아기소릴 냈을텐데, 아이가
귀찮아, 좁아졌다, 불편해
기차나 조바져따 부푼해.
아기같이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한국경험이 없어서인가 한국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자연스럽게 한국어환경속에서 배우는 상황 기준으로 봤을때 한 5살정도 발음. 어휘는 어른인 우리와 대화를 많이 하는편이라 6학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무섭게 발달한 편인데,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 백퍼 알아듣는데, 발음이 그렇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충격.....
나는 이 아이의 손을 잡고 킨더가든간 첫 날의 고통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이가 너에게 떨어지고 첫 수업이 시작되면 너가 울지, 아이가 울지 둘 중 하나는 적어도 울음보가 터질거라는 킨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문밖을 나오며 하염없이 통곡하던 내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철저한 계획의 성공의 결실로 태어난 둘째 아이, 내가 지나가는 아이마다 예뻐하면 내게 슬쩍와 눈을 흘기고, 내 옷가지를 자신쪽으로 잡아당기던 아가가 이제 중학교에 다닌다.
아이에게서 내 존재가치를 찾았던 것 같다, 아기라고 부르며 멀쩡한 청소년 하나를 과소평가하며 그 자리를 '엄마가 아직 있어줘야하는, 엄마가 필요한 상태'로 만들며, 아이를 사랑과습으로 자라게 한 탓에 둘째는, 같은 나이때의 의젓했던 첫째 같지않게, 응석쟁이에 조금은 스포일드 되었음을 인정한다. 넘치게 주는 것이 절제보다 훨씬 쉽다. 중안이 유난히 짧은 동글납짝한 얼굴에 약간 처진 커다란 눈망울과 긴 속눈썹 그리고 양쪽볼 옴폭패인 보조개를 빛내며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누가 사랑을 절제할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다.
물론 학교 생활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해보이고 자생력이 부족해보이며 아직 엄마가 제일 좋을거라는, 내가 기대어살던, 나만의 착각만큼은 오늘 깨달음을 시작으로 과감히 정리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