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조차도 내면의 힘이 있는 사람에겐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된다.
채 어른이 되기도 전, 20대 초중반에 캐나다 이민을 왔다. 모든 개체는 그 종류와 무관하게, 남들은 쉽게 느낄지언정, 나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나의 한계점을 여러번 부딪혀보고 깨지는 한편,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괘 괜찮게 잘 하는 것을 아는 과정에서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저울질은 획일화 된 제도권교육에서 벗어나서 맨 몸의 삶의 현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젊은 날에는 자신의 젊음을 모르 듯,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캐나다로 오기 전, 내가 놓였던, 한국 서울은 나를 필요이상으로 떠받들어 줬기에 난 원래 세상이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일까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의 대우가 따뜻하고 포근해, 결코 그 대우를 놓치지 않으려 유,무의식적으로 내 스스로가 노력하며 살았던 부분도 있긴 하다. 그만하면 됐지 하는 이름의 대학교라는 제도권 교육을 받았고, 다들 자신들의 체면과 명예를 지켜야하기에 서로가 싫은 소리 한 마디 할 수 없는 기관에서 이름만 인턴이었지, 우쭈쭈 치켜세워주고 모두가 위해주는 귀엽고 예쁜 막내경험, 그리고 공립학교 선생님 대우와 견주어도 뒤쳐짐이 없는 복리후생에 교사취직은 물론, 원아조차도 쉽게 될 수 없는 '대학부설' 유치원 정교사라는 첫 직장의 감투가 원 부모님들을 비롯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줬다.
'내가 잘나서 받는 특권'이므로 어디에서나 통용될거라 무의식하고 있었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실력도 나 라는 사람의 가치고 능력도 아닌, 내 나라라는 프레임과 위치와 기관이 주는 착각 이었다.
이 점을, 중 2병 시기가 한참 지난 시점에서조차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수도없이 우수수 많다.
아무리 교권이 무너졌다지만, 다대일의 구조안에서 힘의 역동이 철저히 보장되는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학교밖에는 아무곳에도 없다. 교육기관에서의 교사직이 보장되었다함은, 일반 회사생활과 달리 나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경쟁이 필요 없고 고난도의 사회성도 요구되지 않음을 뜻한다. 부당한 대우, 상사의 괴롭힘을 당연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익숙한 환경에서 나만 초임자로서 자존심 긁혀가며 일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신입직원의 자리인데, 그 경험이 없이 애초에 '선생님' 소리들어가며 능력에 상관없는 대접을 받으며 일을 했으니, 이미 세상에서 진물나게 데어 본 3040의 이민생활의 난이도와 나의 난이도,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음이 이해간다.
그들은 내가 보기에 어딘가에 지쳐보였었다. 왠만하면 사회생활을 하고싶지 않아했다.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나의 이민초기에 만난 3040언니들이 학벌이나 능력이나 재산이나 그 어떤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새로운 환경에서 살겠다고 새로 이민을 왔으면서도, 생동감이 보이지 않았고, 이미 고단하고 먼 길이 될 것을 뻔히아는데, 애초에 채비를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경제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언니들의 속사정을 그 때에는 알바가 없었으니, 솔직히 말하면, 오직 자신의 아이들에게만 자신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한 채, 영어도 포기하고 직장생활도 학업도 포기하고 사는 그 사람들이 한심해보이기까지 했었던 것 같다.
이민와서 만나는 세상은 곤두박질 그 자체였다. 낙하가 아니라, 거의 추락에 가까웠다.
이민 1년차, 나는 사회복지센터에 매일 9-5시까지 봉사를 다닌적이 있었다. 나의 교사경험과 자격증을 살려 취직할 수 있는 자리를 알아보고자, 밑물 작전으로 들어갔던 봉사활동 자리에서 나는 꽤 잔혹한 피드백을 받았다.
그 곳에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이나 교사나 할 것 없이,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고자, 실수를 해도 모르는 척, 이 곳에서 태어나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에서 작년에 온 나를 토닥여줬지만, 나를 냉정한 눈으로 보고있던 한 사람, Nathan은 심각하게 내게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
잘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나에게 엄포를 놓은 것은 그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봉사활동 했던 복지센터에는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 다 있었는데, 그 곳은 타국에서 이민을 처음와 학교 배정이 채 끝나지 않은 아이들이 학교와 자신의 문화의 브릿지 과정으로 다니는 간이 학교같은 곳이었다. 난민으로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아이도 없었기에, 애초에 내가 기대하고 간 통역일감도 없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과학과목에 보조교사가 필요했던 Nathan은 나를 고등반에 배치하기를 바랬었다. 그 곳에서 나는 소규모 그룹안에서 아이들 각각에게 필요한 첨삭지도를 해주었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좋아한다. 자신의 남자친구이야기, 캔디선생님이 그려주는 그림이 좋다는 이야기, 같이 놀자는 제안...
캔디 선생님 설명이 머리에 더 쏙쏙 박힌다는 이야기
아이들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온 자리에서, 캔디선생님의 설명이 머리에 '더' 콕콕 박힌다는 말은 내게 더 할나위 없는 찬사였다. 그 날도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썩은 웃음을 지으며 내 쪽을 쳐다보던 네이튼은 갑자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일렬로 서라며 명령 했다. 키가 190cm가 넘었던 Nathan은 유난히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게 아이들을 키 순서대로 일렬로 세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작은 교실에서도 꼭 걸상이나 책상위에 올라가 히틀러처럼 연설하는 것을 즐겼다. 참 부자연스러운 캐릭터구나..
명색에 사춘기를 지나본 성인이라면 이 또래 남자아이들이 신체 사이즈에 얼마나 민감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 사회복지기관 교사라면서... 사춘기시기, 나라가 전쟁에 의해 날아가 어쩔수 없이 난민 처리된 고등학생 아이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채워주는 것보다 본인의 큰 키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려하는, 그의 치졸함을 왜 나는 이제서야 인식할 수 있는걸까. 그에 의해 움크러든 작은 아이들을 위해 미친 척 한마디 했어야했다. 원래 키 대로 줄서는 문화의 한국사회출신 사람이었던 내 잘못이다. 그 후,15년이상 캐나다에서 살며 느낀 바, 그의 행위는 여기 기준에선 다소 맞지않는 방식이다. 다소 유치하지만 남자 사춘기 아이들을 교사로서 다루는 그 만의 유일한 방법인걸까.
유난히 키가 작은 퀘백주 사람들을 제외하면, 캐나다에서 고등학생정도면 남자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170cm가 넘는다. 작은 여자아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160대의 동양인 보통여성 키인 나는 흑인 위주의 그룹에서 키로 보면 중학생 정도의 사람이지 결코 성인사람 일 수 가 없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던 Nathan은 내 이름을 부르며, 앞에서 네 번째였다 다섯번째 줄에 아이들 사이에 끼어 서라고 했다. Nathan이 혹시 내가 교사로 봉사온 것을 모르나? 하는 생각에, 교사 명찰을 보이자, 그런건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웃으며 애들사이에 나를 끼워넣었다. '캔디, 넌 아직 이 사회에서 애지, 어른이 아니야.' 라는 무언의 쥐어박음이었다. 내가 지금 저 새끼를 한국사람 특유의 '착한사람병'때문에 무의식중에 참고 있나? 이런 대우를 받으며 참을 수 있는 다른 선생님이 있을까? 내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더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처신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이 곳 문화를 모르는 이민 초년차로서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하는 기대감에 지켜보는 것을 택했던 것같다.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Nathan의 행동에 당황하며, 캔디는 교사라고 말했다. 가진것은 키 밖에 없는 야만 새끼의 오만심이고, 유치함이다. 이건 바로 말로만 듣던 직장내 괴롭힘일까...퇴근후에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너 보다 위고, 이 구역은 내 나와바리니까, 우쭐대지 마라'라는 그의 유치한 처신을 꾹 참고, 다음날 다시 출근한 나를 보며, 이번에는 영어괴롭힘이 이어졌다. 간단한 오더를 내리는데, 미친듯이 복잡하게 설명하며, 내 머리속을 작살내 당황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요구사항을 인지했던 나는, 그가 다른 교실에 가 데려오라던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나는 아이가 화장실에 간 상태라서 데려오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의 말에 당황한 Nathan은 내가 바른 말을 했건, 틀린 말을 했건 정확히 본인이 원래 목적하고 싶던 말을 했다. 가련하게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캔디, 너는 영어가 안 되기 때문에, 이 곳에서 일 할 수 없겠구나!" 내가 본인의 명령을 따르기 싫어, 잔머리를 쓴다고 생각했던걸까...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국사람 채면상 멱살잡고 싸울 수는 없고, 억울함과 화가 섞인 울그락불그락 한 얼굴로 책상만 바라보고 눈물고인 눈으로 코워커를 바라보고 있던 나였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한 나야. 코워커들과 수퍼바이저는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이며, 다음 주는 Nathan의 휴가라 그 사람과 얼굴 볼 일이 없을거라 말했다. 모두가 짜여진 각본같았다. 이렇게 당한 건 나 뿐이 아닌듯했다. 마치 모두가 나이스한 상황에서 고춧가루 역할을 그가 매번 맡은 듯했다. 최상의 퍼포먼스라는 평가로 나는 그 봉사활동에서 가장 좋은 평가서를 받고, 6개월간의 봉사를 끝냈다.
이 곳과 인연이 아니라면, 더 높은 곳으로 갈거야, 내가 원어민인 너 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잘 될거고, 니가 왜 그렇게만 살아야하는지를 그 이유를 증명해보일거야. 다짐하며 살았고, 그 때의 피드백은 꽤 긴 기간동안 내 이민길에 힘을 박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어떤 의도에서 나를 괴롭혔는지는 사실 상관이 없다. 나는 아직도 Nathan이 내 미래를 밝히기 위해, 조직의 쓴 맛을 보여준, 하늘이 내린 조력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미 나의 가능성을 본 그가, 보통 힘으로는 이민생활을 버틸 수 없으니, 내가 독기라도 안고 앞으로 나가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말이다.
한국의 격려와 우쭈쭈가 달콤한 구름사탕이라면, 이 곳의 격려는 매콤한 후추맛이다. 달콤한 구름사탕맛에 후추맛이 주는 자극이 덮혀버릴까봐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어리광을 피울 수는 없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