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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Jan 14. 2023

조력자가 필요했던 애들때의 나

나를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믿을 수 있는 어른들이 존재했던 그 때

11살무렵부터 나는 부모로부터 정서적 유기 상태에 놓여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동생의 백혈병으로 엄마는 병원에 가 입원한 동생을 간호하느라 2주의 한번 주말마다 집에 와 계셨고, 아빠는 밤낮없이 동생 병원비 버느라 바빴기때문이다.

보험으로 일정부분이 커버되긴 했지만, 한번씩 있는 무균실 입원이라든지 여러가지 치료비를 감당하기에 나의 아빠는 너무나 바빴다.

나의 부모는 몸은 내 동생을 간호하고 내 동생을 간호할 돈을 버느라 바빴으며, 마음은 온전히 내 동생에 대한 걱정, 낫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바빠

몸과 맘이 오롯히  동생에게 종속되어 있는, 나에게는 그저 예전에 내 엄마, 아빠였던 그들이 허수아비가 되었다.


허수아비를 엄마, 아빠라 부르며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외로웠다. 4학년밖에 안된 아이가 그리움을 알았다. 교회에나가 내 동생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데에는 어서빨리 동생이 퇴원해 엄마 아빠를 다시 내 곁으로 되돌아오게 해달라는 의도가 더 컸던 것 같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하나님을 더 찾는 대신, 나는 그 자체로 그냥 내 부모님으로부터 억지로 정서적 독립을 이루게 된 것 같다. 지금 내가 이민을 와 한국에 대한 별 그리움 없이 살게 된 이유도 사실, 내가 초등학교때부터 남모르는 마음의 독립을 이뤄버려서, 마음의 빗장을 이미 내 부모를 향해 잠궈버렸기 때문일거다.


동생이 아프기 전, 나는 2살 터울 동생을 잘 놀아주고, 잘 돌봐주는, 성숙한 언니였고, 그런 나를 잘 따라주는 동생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내가 동생을 사랑해주고 예뻐해주고, 귀엽다고, 아기 라며 돌봐줬던 건, 부모님이 전적으로 큰 딸인 나만을 사랑한다는 느낌이 있어서였던 거라 생각이 든다.

나는 온전히 부모님을 혼자 차지하고 있으니, 내가 널 돌봐줄 수 있어, 이런 생각에서 였던 거다.

내가 척 봐도 엄마는 나와 동생에 대한 사랑비중이 50:50이었고, 아빠는 80:20 이었다.

천의 고아로 자란 아빠가 스물 아홉살에 결혼해서 낳은 첫 딸은 아빠에게 우주 이고, 공주이고, 보석이었으니까

아빠가 내게 부비던 아빠볼의 감촉과 까슬한 턱수염감촉은 서른일곱먹은 내가 아직도 이 새로운 세상에서 중2병걸린 청소년처럼 세상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탐색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됨에 틀림없다.


그 모든 사랑은 11살이 되고, 동생이 아프면서 홀딱 유령이 앗아갔다.

그때 만일 아빠가 부모님이 계셔서 나를 돌봐줄 분들이 계셨더라면, 내가 엄마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았으려나?

가까이 사는 엄마의 언니들, 그러니 이모들이 나를 좀 더 보살펴주었더라면 그때의 내 마음이 조금은 더 따뜻했을까?


유난히도 선생님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사하고 그들을 잘 따랐던 건, 어른의 따뜻한 잔소리가 고파서 였던 것 같다.

"라떼"라는 말로 기성세대의 핀잔 섞인 조언을 취급하는 요즘세상이지만, 조금 예쁘게 포장한 사랑이 담긴 어른의 조언은 사랑과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보약같은거다.

아직도 난 나 먹으라고 반찬 해다주신 다은이 엄마랑 인옥이 엄마가 생각난다. 아이를 키우고 보니 드는 감정이다.내 아이 챙기는 것도 쉽지 않은 데, 아이의 친구까지 사랑해주시고 마음 써 주신게 아직도 가끔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단발성으로 그친 한번의 관심표현이었지만, 그 마저도 이렇게 크게 기억하고 감탄한다는 건, 내가 정말로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아직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였다는 뜻이다. 한동안 이 특성때문에 성인이 된 후 인간관계에서 몇 차례 홍역을 치루기도 했어서, 지금은 또다시 인간이란 존재에 마음의 빗장을 살포시 잠글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인간이 조금은 그립고, 소통이 그리워지는 건, 생각을 정리하는 글쓰기가 많은 부분 해소시켜준다. 대화를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 사귀고 소통하기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지만 정작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실 그 시절 받지 못한 애정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행위 일 수 있다는 자각이 나 자신을 초라하게 한다. 뭐가 진실일까, 뭐가 진실인들 어떠한가, 내가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여러가지 이런식의 고민의 고민을 거친 결과, 하등 고민할 필요가 없는 행위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의 마음속 어른 아이를 나 자신보다도 먼저 재빠르게 파악해, 저들이 원하는 것을 나로부터 잽싸게 낚아채는 이 들이 있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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