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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Jan 14. 2023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엔트로피가 쌓이는 과정일까

게다자신의 행동 원인을 모르면 엉망진창되는건 시간 문제

나이를 먹어감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나 이다. 서른 다섯이 넘으면 뭔가 이루었을 것 같고, 내 마음은 보다 안정적여졌으며, 인생이란 그런거야 라며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것같았다. 누구나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그 반대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나의 몸과 마음은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금도 이런데 사십, 오십, 육십, 칠십이 되면 뭐가 더 나아져있을까 더 엉망진창이 되어있지는 않을까. 일곱살 많은 남편과 살며 일곱살 후의 나를 그려본다. 내가 내 남편의 나이가 되면 어떤 존재가 되어있을까. 로스쿨에 들어가기를 목표하는 남편은 어제 마지막으로 LSAT시험을 쳤다. 나와 만나기 직전인 28살부터 항상 되도않는 입신양명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기에 장장 15년가까이 법대를 로망하는 로스쿨입학 희망자이다. 그동안 사법시험이 없어지고, 로스쿨이 생기고, 이민을 오고, 아이를 낳았지만, 법대 입학하는 건 남편의 온전한 꿈이다. 사실일까? 내가 볼때, 사실 남편은 법대의 목적이 없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린시절에 부모로부터 마음의 문을 걸어잠궈 자신의 외로움을 처리하기 합당하고 온전한 목적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깊이 있는 자기 탐색을 하는 사람일 수록 상대를 볼 때 그 행위자체가 아닌, 행위에 숨겨져있는 속뜻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내 마음, 내 행동에도 그렇듯


내가 학교가는 시간 외에는 남편과 24시간 붙어 있는 나 이지만, 솔직히 말해 남편은 나와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산다. 아니 너무 어린시절 우리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인 어린아이시절부터 우리는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그는 연습을 하던 사람들이다. 다른점이 있다면, 집안에서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그되, 밖에 나가 사람들과 소통하고 인정받고 따뜻함을 느끼던 나 자신, 그 반대로 집 밖에서 어떠한 네트워크도 만들지 않고, 집 안에서만 자신을 돌봐주던 외할머니와 상호의지하며 살던 내성적인 내 남편이다.  나를 결혼상대자로 지목한 이유도, 내가 자신의 할머니 같아서 라고 하니 나에게는 소통의 창을 열고 싶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들어오면 소통이 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는데, 그건 바로 내가 문을 걸어잠그고 있어서 인지도모르겠다.


결혼하고 처음 나는 많이 놀랐다. 문을 활짝열고 소통할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은 항상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노력해줄필요 없는데... 라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었기때문이다.

결혼 초기 3년간의 임신과 출산으로 인내력이 단기간에 바닥난 나는 깜짝놀라 만지면 톡 하고 쫄아 드는 꽃 처럼, 그렇게 그의 말대로 마음의 문을 닫아주었던것같다. 11살 이후로 내가 내 엄마, 내 아빠에게 했듯이, 트리거가 존재한다면 내 마음의 문을 누구보다 쉽게 잠그고 나를 방어하고자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 그럼 됐어

결혼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와 내 남편의 사이는 사실 아무문제가 없어보인다. 어린시절의 내가 그러했듯 나는 사회적으로 온전한 방법으로, 수용가능한 방법으로 내 외로움의 에너지를 풀고 있으니까. 아이를 정성껏 돌본다든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던지, 맛있는 요리를 한다던지. 하지만 나는 안다. 밖에서 사람들과 맺는 따뜻한 관계가 집안의 남편과 맺는 관계의 온도보다 더 높다는 것을, 성별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나를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고, 나의 실수를 덮어주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집에 있는 내 남편과 나는 서로 대화를 하거나 서로를 지지해주는 그 힘을 이미 어린시절에 좌절시켜버린 느낌이다.


어제 남편이 본 LSAT시험, 안팎으로 빗장을 걸어잠근 남편은 남과 소통할 맘이 없어서인지 캐나다로 오기 전과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영어실력에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문화이고 소통이고 공감이라 늘 말하지만, 자신의 마음의 빗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걸어잠긴지도 모르는 남편에게 나의 말은 그저 귓볼을 스치는 공기, 이미 사람과의 소통을 좌절시켜버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예쁘게 말할 수 없는데 언어시험을 어떻게 잘 볼 수가 있을까, 당연히 망했다. 나에게는 뭐, 시간이 없어서 그랬다고, 컴퓨터 부팅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에너지를 다 써서라고 말하는데, 아니다. 아직도 자신이 왜 시험을 망쳤는지를 알지 못한다. 해커스 토플보카를 아무리 달달달 외워도 문화적 컨텐츠, 문맥의 뤼앙스를 알지못하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전혀 알아 들을리 만무하다. 자신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남과 소통하려는 마음이 없는 한, 변호사라는 직업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사실 자체를 단 1퍼센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어디부터 설득이 가능할지 막막해 가슴이 답답하다. 게다가 이 곳은, 당신이 낳고 자란 내 나라가 아니라고, 당신의 몸과 마음에는 이 문화 안에서 소통해본 경험이 없기에 오직 소통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언어뿐이라고, 사람들하고 대화를 제발 많이 하는 것 밖에 문화에 그나마 자신을 조금 노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 이라고. 자신이 진정하고 싶은 일이 변호사라면 자신의 마음 빗장이 이미 강압적이고 디테일을 사사건건 참견하고 조종하려했던 엄마로 인해 어린시절에 마음의 문이 잠겨버렸다는 가슴아픈 진실을 마주하던지, 아니면 사람과의 소통에 관련된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하던지.

여기서 진짜 문제는 남편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 또한 트리거가되어 강압적이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조종하는 엄마의 모습을 투사해 곧장 빗장을 잠궈버린다는 게 그게 문제다.


철저히 자신의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정말 삶이 나이 먹어가면서 엉망진창  being messy, 엔트로피가 높아감은 말할 필요없는 진실이다,

핵심을 모른 채, 열심히만 살면, 열심히 끝에 남는 건 성취가 아닌, 또 열심히뿐이라고 이 사람


앞으로도 저 사람과의 언어적 소통은 솔직히 불가능할 것 같다. 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위해 소통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하아 마음이 답답하고, 이럴거면 왜 같이 사나 깊은게 내 솔직한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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