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책부록] 발리에서 생긴 일 1 - 첫날밤

지구별 여행자 두 사람이 신혼여행의 성지 발리에서 보낸 첫날 밤

by YouOn

우리 둘은 자타공인 베테랑 지구별 여행자이다. 그런 두 사람이 아주 우연히 해외에서 만나, 이렇게 함께 여행을 떠난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적 혈혈단신 호주로 이민을 가서 학교를 마치고, 곧이어 스위스로 건너가 호텔경영을 전공한 후, 여러 특급 호텔의 호텔리어와 외항사의 승무원으로 일하며 유럽 생활을 했다. 글로벌 대기업과 카지노 룰렛판 같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들이 일터가 되기도 했고, 프로로서 클럽하우스에 상주하며 외국인을 티칭하기도 했다. 동남아로도 건너가 숙박업과 여행업에도 몸담았고, 크루즈에 승선하며 남미와 남극에까지 행동반경을 넓히기도 했다.


다양한 나라에서의 컬러풀한 라이프, 그리고 다시 호주를 주거지로 선택하게 된 이유, 이후의 은퇴 플랜에 이르기까지. 그와 만난 첫날, 그의 이런 버라이어티한 인생사 앞에서 나의 두 눈은 반짝, 두 귀는 쫑긋했었더랬다.




그에 비하면 단조롭지만, 나 또한 한 지구별 여행자이기도 한데, 나의 스토리는 조금 늦게 시작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살던 지방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무의식적으로 해외에 대한 결핍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조금씩 넓은 세계에 눈을 떴고, 그 눈은 입사하며 해외로 출장을 가게 되면서 엄청나게 커지게 되었다. 첫 해외로 나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아직도 번쩍번쩍한 페트로나스타워가 눈앞에 생생하고, 일정을 마치고 짬 내어 갔던 랑카위 섬에서 렌터카를 몰던 때가 바로 어제 일만 같다. 외국계 기업의 특성상, 그 이후로도 해외 출장이 꽤 있었고, 인센티브로서도 몇 번의 해외여행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나의 이 해외 바이브를 한껏 끌어 올려준 회사의 생태계 덕분에도 나는 자연스레 공항을 내 집 드나들 듯 다니게 되었다.


말 그대로 해외 뽕에 취해서 국내에서는 연차 한 번 없이 소처럼 일하며 해외 나갈 날만 손꼽았다. 대체휴가를 받을 수 있는 주말 근무도 자처하며 드래곤볼처럼 귀중한 연차를 차곡차곡 모아 나갔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일찍이 아시아는 마스터했고, 유럽과 미국 또한 2-3주씩 시간을 내어 도시 하나하나를 도장 깨며 지구별 여행자로 살았다. 당시에는 '버짓 트래블러'로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경유 2번 비행 편이라든가 공항 노숙도 감행했고, 숙소비를 아끼기 위해 대부분은 에어비엔비 쉐어룸을 빌려 현지인처럼 사는 방법을 택했다. 사실 이동수단이나 숙소, 음식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나에게 여행은 쉬고 즐기러 가는 호캉스가 아니라,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시야를 넓혀주는 'eye opener'였었기에. 그렇게 나는 두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비행기를 타며 지구본에 나의 흔적을 넓혀나갔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써놓고 보니 둘의 만남이 요란할 법도 하다. 혼자서 지구별을 떠돌던 여행자 둘이 그것도 신혼여행의 성지라고 불리는 발리에 가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니... 발리에 갔다 왔다고 하면 꼭 나왔던 이야기가 "누구랑 갔느냐"라는 질문이었을 정도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발리=신혼여행'은 공식인 것 같다. 그의 "같이 갈까"라는 선전포고 이후에, 그래서 어디를 같이 가면 좋을까, 하며 단 꿈을 꿨었는데, 그때 바로 여러 여행지 중 유독 발리가 마음을 끄는 선택지로 다가왔던 것도 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행지가 정해지고 나자 그는 자기가 찾아봤다면서, 여덟 곳의 호텔 리스트를 보내주고는 자기가 예약할 테니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달라고 했다. 혼행러이자 버짓 트래블러로서 언제나 숙소 따위는 중요치 않은 것이었는데,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시간을 들여 좋은 숙소들을 골라주다니... 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했다.




인천발 발리행은 자정에 가까워서야 떨어지는 항공편이었기에, 착륙하면 비몽사몽한 상태로 바로 숙소로 직행해야 한다. 나는 당연히 비행 이후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는 다음날 도착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반년만에 보는 건데 잠도 좀 자고 제정신인 상태로 꾸미고 나서 그를 만나고 싶은 것이 무릇 여자 마음이기에.


그런데 그는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혼자 야밤에 숙소로 가게 하냐면서, 자기 마음이 편치 않다고 오히려 본인이 먼저 도착해서 공항에서 대기하고 에스코트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이내 그의 다정함에 그러자고 했다. 당일 막상 나의 비행 편은 연착이 되어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렇게 새벽 1시가 훌쩍 넘어서야 도착한 발리.




짐을 찾으면서도, 그래서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심장이 두근두근대며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이윽고 세관을 거쳐 입국장 문이 열렸다. 그 문 앞에 서 있던 한 남자, 그토록 그리던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전부터도 가만히 있지 않던 심장은 아예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리움과 설렘과 반가움과 온갖 좋은 것이 다 담긴 선한 눈빛을 하고서 커다란 두 팔을 벌려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내 캐리어를 끌며, 공항에서 미리 셋업 해놓은 택시로 이동했다. 평소 같으면 습도 높은 끈적끈적한 공기에 짜증지수가 100이었을 테지만, 습도가 높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꼬리를 귀에 건 채로 얼마나 웃어댔던지. 서로 눈만 마주쳐도 꺄르르 하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만 봐도 웃는다는 사춘기 소녀 감성이 따로 없었다.



그나저나 반년 전에 시드니에서 반나절 본 게 전부인데, 이렇게 두 번째 만남에, 그것도 만나자마자 바로 호텔행이라니... 누가 보면 발라당 까진 애인줄 알겠는데? 하며 우리는 또 꺄르르 웃어댔다. 이윽고 호텔에 도착했고, 그는 프런트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오는 동안 잠시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낯선 곳의 새벽, 몽롱한 상태에서 호텔 프런트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저 모든 게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뒷모습은 또 왜 이렇게 멋있는 것인지. 꿈에 취했는지 그에 취했는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잘 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야밤의 조용한 방에 두 남녀가 같이 있게 되니, 그제야 우리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온 곳이 호텔 침대 위라니, 누가 보면 큰 오해할 만도, 배꼽 잡고 웃길 만도 했다. 그 역시도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했던 것인지,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레드와인 한 병을 사 왔다고 하며 얼굴을 붉히며 주섬주섬 꺼냈다. 나는 그가 졸졸졸 따라주는 영롱한 빛의 와인을 두 손 모아 공손히 받았다. 우리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애꿎은 TV 채널을 돌려댔다. 서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대면서. 몸은 노곤했지만 바로 씻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침대에 벌러덩 누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잔잔한 와인 한 잔에 부끄러움을 녹여내며, 우리의 아이스브레이킹(?)이자 워밍업(?)이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