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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Sep 18. 2018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

나의 집단상담 일기 02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계획 같은 건 그 계획을 실행하기 3분 전쯤에 세워가며 살았다. 그날도 강의가 시작되기 3분 전, ‘수업 첫 주는 OT니까 그냥 들어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강의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수강 신청을 하지도, 청강을 들을 수 있을지 교수님께 미리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이 강의가 뭔지, 더 나아가 이 강의가 내 인생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는 뜻이다.


   5학년 1학기였다. 마지막 학기를 등록하기까지 학교를 7년 다녔다. 초등학교 이후로 6년 이상 학교를 다닐 일이 또 있을 줄은 몰랐지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보니 6년쯤은 가뿐하게 넘겼다.


   그동안 4년의 학사 과정을 착실히 이수하고 졸업하는 동기들의 어깨 너머로 부지런히 배웠던 건 전공 지식이 아니라 무슨 수업이 꿀이라더라 하는 지식. 쓸 수 있는 휴학을 모두 쓰고 등 떠밀리듯 돌아온 학교였다. 힘들지만 배우는 게 많은 수업보다는 안 배우고 안 힘든 수업을 골라 듣고 싶었다.


   “언니, 심리학과에 집단상담이 그렇게 꿀이래.”

   여섯 학번 아래의 총명한 후배들 사이에서 곧 도태되고 말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친한 후배가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마침 부전공으로 듣는 심리학과의 이수 학점이 모자랐던 내겐 무척이나 솔깃한 정보였다.


   “상담이면 실습처럼 뭐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거 수업 대신 심리 상담 같은 거 받는 거라던데. 시험도 없고, 리포트 제출로 끝이래.”  

   “와, 그래? 그럼 나 그거 들어야겠다!”

   “근데 몇 가지 문제가 있어. 이 수업 정원이 12명이야. 그리고 심리학 주 전공생 우선 강의라 아마 듣기 힘들 거야.”     


   그래도 수강 신청이 성공하면 그만 아닌가!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신청은 해볼까, 하던 희망의 끈을 놓은 건 집단상담의 시간표를 확인하고서였다. 진심으로 들을 준비가 된 사람만 들을 수 있게끔 골라낼 작정인지, 수업의 시간이 무려 월요일 아침 1교시로 배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꿀이라곤 하지만 월요일과 1교시라는 최악의 교집합 앞에선 꿀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의 계획서라도 좀 살펴보고 결정하고 싶었지만 15주짜리 강의 계획서에는 ‘집단상담 실습’이라는 문장만이 열다섯 번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쯤에서 다시 차근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후배의 말마따나 좀 어렵겠지 싶었다.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곁들여 듣는 처지인데 심리학 주 전공생 우선 강의라니. 더군다나 서른 명 가까운 전공 수업도 수강 신청을 성공하기가 힘든 마당에 정원이 달랑 열두 명이라면 더욱 가망이 없을 듯했다.


   그런 이유로 수강 신청을 깔끔하게 포기했던 수업을, 무턱대고 들어갈 결심을 한 것이다. 수강 실패에 보기 좋게 실패해 들어야 하는 21학점 중 9학점만 간신히 건진 상태였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OT가 진행되는 개강 첫 주에 이 강의 저 강의를 기웃거리며 교수님께 증원을 부탁드리는 수밖에. 상황이 다급해지니 월요일 아침에도 일생의 부지런을 끌어 모아 집을 나섰다. 그날, 집단상담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3분 전, 일단 들어가서 받아주시면 감사히 듣고 아니면 다른 수업을 알아보자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가방도 없이 펜 하나만 주머니에 덜렁 넣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실의 문을 벌컥 열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긴 건 분명 강의실이었지만 책상이 없었다. 짝을 잃은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가 되어있었고 교수님께서 그 원의 한 자리에 앉아계셨다. 내가 알던 강의실과는 사뭇 다른 괴이한 구조에 과연 나 따위가 들어가서 앉아도 되는 건지 망설여졌지만 눈치 없는 발 하나가 이미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고 싶었지만 자리가 원형이니 어디를 앉든 똑같았다. 하는 수 없이 교수님과 제일 먼 곳에 앉으려고 빙 돌았는데 그러다 보니 교수님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버렸다. 앉기 직전에야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꾸벅 인사를 드렸다. 어쩐지 긴장이 됐다.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가 내리고 다시 올리기를 여러 번. 결국 다리를 딱 붙이고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뻣뻣하게 앉았다.


  곧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교수님을 뵙자마자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나도 인사를 드리긴 했지만 저 각도는 아니었는데. 벌써 망했다, 싶었다.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열 몇 명이 모인 조그만 강의실. 아홉 시가 넘어가자 교수님께서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셨다. 첫 시간부터 이름을 외우시려는 듯, 한 명 한 명 부르실 때마다 눈을 들어 확인하셨다. 호명되는 인원이 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수강 신청도 하지 않고 청강 허락도 받지 않은 애가 대뜸 와서 앉아있으니. 이제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출석부엔 열두 명인데 강의실엔 열세 명이 앉아있는 기적. 교수님께서 의아한 표정으로 안경을 내리고서 출석부를 눈 가까이로 가져가셨다.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용감해진다던가. 도리어 뻔뻔해지기로 결심한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교수님, 저는 국문과의 김버금입니다. 수강 신청은 하지 못했지만 집단상담이라는 강의가 궁금해서 들어왔어요.”

   “심리학과 학생이 아니라고?”

   “네, 아닙니다."

   “그럼 자네 혹시 내게 청강 메일은 보냈던가?"

   “아, 저, 그게, 음, 아니요...”


   교수님께서는 더 이상의 말씀 없이 탁 소리와 함께 출석부를 닫으셨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알아서 눈치껏 나가야 하는 건지, 이대로 앉아 있어야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곁눈질로 살펴본 교수님은 깍지를 낀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계셨다. 그 옆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눈이 마주칠까 봐 엉뚱한 천장을 올려다봤다. 교수님을 제외한 다른 모두가 지금의 정적을 유지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몇 분이 지났다. 정적에 천천히 익숙해지면서 팽팽했던 긴장감이 차츰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것처럼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고 누군가는 앞에 내려놓고 있다. 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있고 누군가는 손을 모으고 있다. 교탁 쪽의 형광등은 꺼져 있고 뒤쪽의 형광등만 켜져 있다. 창 밖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고소한 커피 냄새가 났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을 때 그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지금의 낯선 상황에 천천히 익숙해져 가고 있을 때였다. 교수님께서 첫마디를 꺼내셨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






   (다음)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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