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버금 Sep 26. 2018

삶과 죽음의 이해

그러니 나는 잘 죽기 위해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세 번째 마음,

이상하다



   영하 오 도쯤은 따뜻하게 느껴지던 한 겨울에 삶과 죽음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계절 학기라는 아웃사이더적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삶과 죽음을 두 배로 배워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의 강의명 때문인지 신청자가 많지 않아 폐강될 뻔 했던 수업이었다. 해가 바뀐 1월에는 미끄러운 빙판길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갔다. 입김이 말풍선처럼 피어오르던 날들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계절 학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사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주 싫어하지만 나는 그래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정규 학기가 아니라야 느낄 수 있는 계절 학기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 분위기라 함은 학점 미달자들이 모인 우울하고 도태된 분위기, 는 아니고 초등학교처럼 매일 학교를 가서 매일 있는 반 친구들을 보는 소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수업은 수강 인원이 특히나 더 적었던 탓에 정말 초등학교 시절에 그러하였듯 모든 학생들끼리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이해라는 긴 수업명을 단 두 글자로 줄여 삶죽으로 부르곤 했는데 삶과 죽음이 한 단어 안에 들어있는 게 부르기에도 듣기에도 썩 마음에 들었다.

  

              

   삶죽 교수님은 조금 독특한 분이셨다. 사실 죽음의 이해로 강의명을 지으려 했지만 학교에서 끈질기게 반려해 어쩔 수 없이 '삶과'를 구겨 넣었다는 말로 강의의 소개를 대신하셨다. 덕분에 강의는 삶 따위는 제외한 죽음, 구체적으로는 장례의 역사, 애도의 문화, 죽음을 은유한 미술과 음악, 종교 등 다방면의 것들을 배우는 시간들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학교에서 교양으로 구분되는 수업들을 들어오긴 했어도 그것은 전공이 아닌 과목의 총칭이었을 뿐 딱히 교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과목명이 교양인 것만 아니라 정말 교양을 쌓는다는 생각이 드는 수업이었다.


   어떤 날은 눈이 왔고 어떤 날은 눈이 더 많이 왔지만 수업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노트 한 권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대부분의 것은 놀라울 정도로 다 잊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것은 딱 하나. 울음과 애도의 방식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이 그것이다.

                        

    "그때와 지금은 애도의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어요. 그때에는 놀랍게도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만 울었답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우는 게 이상했던 시대였어요. "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정말 이상하죠?"     

   그러다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해보니까 그래요. 지금의 우리는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울지는 않지만 대신 다 같이 웃어요. 반대로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웃으면 이상하다고 한단 말이에요."     

   교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정말 이상하죠?"         

    

   창 밖에서는 눈이 내렸고 머리 위에서는 히터의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둥글게 맴을 돌았다. 정말 이상하죠? 네, 둘 다 정말 이상해요, 라고 생각했다가 아니요, 둘 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생각했다. 웃음과 울음은 꼭 자음 하나 만큼의 차이가 난다. 그 작은 차이의 틈 사이에서 울고 웃는 동안, 사람의 일생이 지나간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멀거니 응시했다. 몇 백 년 전의 혼자 울었던 그 사람은 알까. 몇 백 년 후의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몇 천 년 후의 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까. 혼자 울고, 가끔은 혼자 웃기도 하는 나를.



                        


   살면서 인생을 양극단으로 보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지만 수업만큼은 그 잣대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 어떤 수업은 무엇 하나도 배운 것 없이 끝나기도 하고 또 어떤 수업은 단 한 가지만을 배우면서 끝나기도 한다.


   삶죽 수업의 경우 비견할 수 없이 후자였다. 그 날의 수업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 혹은 배운 것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게 된 데에는 그 내용이 기억함직한 것이었다기보다 그 내용을 들었을 때의 기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 때문이었을 테다.


   삶죽 교수님께서는 삶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배우면서 삶을 배웠다. '삶과'를 뺀 나머지만으로도 삶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죽음은 삶과 같다는 것. 어쩌면 나는 잘 죽기 위해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그 사실이 이상하다가 이상하지 않다가 정말 이상하다가 정말 이상하지 않다.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 your_dictionary_

* 그리고 사진 ⓒ 2nd_roll


매거진의 이전글 한 발 느린 자전거 수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