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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Nov 24. 2018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시콜콜해서 쓸쓸한 비밀들



스물세 번째 마음,

쓸쓸하다



   생각하면 까닭 없이 쓸쓸해지는 기억이 있다. 무료함에 지쳐 온 몸으로 방바닥을 밀고 다니던 어린 시절, 책상 위에 놓여있던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한 날이었다. 일기장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늘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장을 보러 가고 없었다. 똑딱이는 시계 소리를 따라 가슴이 빠르게 콩닥거렸다.


   엄마는 밤에 일기를 썼다. 밤은 내가 일기를 쓰는 시간과는 다른 온도의 시간이었다. 나의 일기가 해가 저무는 오후에 저녁밥 짓는 소리를 들으며 쓴 일기라면 엄마의 일기는 모두가 잠든 어스름한 자정 무렵에 쓴 일기였다. 나에겐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엄마의 일기에 대한 또렷한 기억은 없었다. 다만 종종 한밤중에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면 보이던 희미한 불빛, 닫힌 방문의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가느다란 불빛이 엄마의 일기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어린 마음에도 일기를 쓰고 있는 엄마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대부분 다시 잠들곤 했었지만, 문을 열고서 몰래 구경했던 적도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고리를 꼭 잡고서 천천히 열면 부엌의 어둑한 작은 등 아래에 앉아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무언가를 사각사각 써내려가는 펜 소리를 따라 유난히 선명 냉장고의 진동소리가 귓속으로 웅웅 들려왔다.


   일기를 쓰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어쩐지 꼭 일기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날은 낯선 엄마의 모습이 서늘해 이불을 턱 밑으로 끌어당기며 잠을 청했다. 엄마에게도 비밀이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제법 어른스럽게 이해해보려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랬던 일기가 어쩐 일인지 책상 위에 활짝 펼쳐져 있었다. 표지가 더 익숙했던 일기장이라 새하얀 속지가 도리어 낯설었다. 몰래 보았단 사실을 들키면 혼이 날 것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엔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팔랑팔랑 넘겨본 일기장에는 빼곡한 글자들이 한 장 가득 적혀있었다. 엄마는 일기에 뭘 쓸까. 엄마에게는 어떤 시시콜콜한 비밀 이야기가 있을까. 콩닥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읽어본 일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옷에 김치 국물을 묻히고 가도 반겨주는 친구. 마른 손에서 고무장갑 냄새가 나도 흉을 보지 않는 친구. 아무 때고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더분한 친구.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도 못했던 내용에 화들짝 놀라 일기장을 덮었다. 원래 놓여있던 모양이 어땠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나오는데 얼굴이 다 붉어졌다. 무언가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것처럼, 자꾸만 가슴이 쿵쿵거렸다.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스름한 자정 무렵에 남몰래 써넣었던, 너무나 시시콜콜해서 너무나 서늘했던 엄마의 일기.


  그 나는 엄마의 비밀을 하나 알았고 엄마도 모르는 나의 비밀을 하나 품었다. 비밀을 먹고 무럭 자란 나는 어느덧 어둑한 자정 무렵에 일기를 쓰는 어른이 되었고, 일기에도 쓰지 못하는 비밀들은 가슴에 따로 품고 산다. 친구가 필요했던 엄마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어도 어쩐지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들을 지니고 있다. 저녁밥을 짓고 둥글게 모여 앉아 밥그릇을 긁는 훈훈한 공기보다 어스름한 밤의 공기를 홀로 견디는 시간들처럼. 시시콜콜한, 너무나 시시콜콜한 비밀은 서늘할 만큼 쓸쓸하다. 키 대신 마음만 한 뼘, 자랐던 밤이었다.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 your_dictionary_ 
*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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