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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Dec 03. 2018

"너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해.



스물다섯 번째 마음,

의연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평균 3일, 아주 늦어도 5일이 넘어가기 전에 한 편씩 글을 썼었다. 심지어 중간에 일본으로 며칠 휴가를 다녀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3일의 기한을 넘지 않기 위해 미리 글을 써놓고 여행지에 가서도 다 못쓴 글을 마저 썼었다. 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5일이라는 기한을 넘긴 날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오늘이 처음으로 넘긴 날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동안 내가 글쓰기에 내 일생의 성실을 십분 발휘했었단 사실을 문득 깨달아서다.

 


   나는 성실과 거리가 멀다. 불규칙적인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고 계획된 일정보다 순간의 기분을 따른다. 이를테면 2주 뒤에 떠나는 비행기를 계획 없이 예약하거나, 물이 떨어지는 샤워기 밑에서 왜 폐업을 기념하는 수건은 없는 걸까하는 고민으로 한 시간을 넘게 골몰하는 식. 일을 할 때에도 100개의 일을 10일 동안 10개씩 꾸준히 하는 것보다 2일은 놀고 6일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남은 2일 동안 일을 하는 식이다.


   성실과 거리가 먼 데에는 이처럼 원체 꾸준함과 거리가 먼 탓이 크지만 사실 생각을 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꽤 많은 시간을 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생각이라는 것이 그리 건설적인 사유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는 ‘쓸모없는 공상’이거나 심지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생각’들이라서 더 그렇다.


   다행히 지금은 '딱히 별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보이는 사회적인 표정'을 제법 잘 구사하게 된 덕분에 그 질문은 피하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에는 "대체 매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라는 오해를 곧잘 들곤 했었다. 그럴 땐 사실 그거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거라고 말하기가 머쓱해 "응? 아 그냥 뭐……." 하면서 자주 말을 흐렸더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주 오랜 과거에는 성실했었다. 더 정확히는 성실을 잘 흉내 냈었다. 공부 잘 하는 딸이 최고! 라는 암묵적 가훈 아래 성실하고 의젓한 첫째 딸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을 때였다. 반드시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던 건 아니었지만 성적이 미진하면 적잖이 실망하시고 성적이 잘 나오면 무척 기뻐하셨던 부모님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압박을 받았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기 위해선 학교 시간표에 최적화부터 되어야 했다. 1시간 단위로 나뉜 시간표가 몸에 맞지는 않았지만 맞추려고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럼에도 주의가 자주 흐트러질 때가 있었는데 골몰하던 습관적인 잡생각들이 불쑥 불쑥 떠오를 때였다.


   2분 30초 안에 풀어야 하는 수학 문제와 한 뼘이 넘는 국어 지문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엉뚱한 공상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떠오르니, 점점 짜증이 났다. 처음에는 내가 집중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의식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분 단위로 세워놓은 시간표에 쫓기는 고등학생에겐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도 사치일 뿐. 그저 나는 공부에 방해만 되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너무 많다고만 거칠게 단정지었다. 그 뒤로 이런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한 시간 단위의 공부 계획을 짜면 나는 20분, 30분 단위로 더 잘게 쪼개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맞지 않는 패턴에 몸과 마음을 맞추기 위해 실제 공부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성실을 흉내 내느라 사춘기를 못 겪었던 탓인지, 나는 대학교에 와서 사춘기를 겪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학교를 땡땡이 치고 과제 따위를 최대한 미루며 불성실과 잔꾀를 배웠다. 10개의 과제가 주어지면 눈대중으로 짐작부터 슬쩍한 뒤 이틀이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어 10일 중 8일은 일단 놀고 봤다. 전이라면 10일 동안 어떻게든 1만큼씩은 하려고 매일 아등바등 고통 받았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내일의 나, 내일 모레의 나를 믿고 오늘의 나는 한들한들 태평하게 보내기로 했다.


   놀아도 놀아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시간이 남아도니 놀다 지쳐 멍도 실컷 때렸다. 멍도 실컷 때리다보니 쓸모없다고 여겨왔던 나의 잡생각과 공상에게도 무한히 골몰했다. 물이 떨어지는 샤워기 밑에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던 내 방에서, 매일 몇 시간씩 걸었던 한 겨울의 성산대교 아래에서. 심심함의 심심함, 무용함의 무용함에 대해 생각했다. 내 글의 씨앗들이 된 작은 사유의 시작이다.



   여기까지 읽고 좋아, 나도 오늘부터 불성실하게 살 거야! 하는 분들은 잠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길. 사실 이 패턴도 말만큼 쉽지는 않아 고통을 받기도 했었다. 이틀이면 끌 수 있을 줄 알았던 발등의 불이 갑자기 확 커져 발등이 활활 탔다든지,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생겨 큰 코를 다쳤던 적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성실과 노력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비교적 불성실해보이고, 비효율적이고, 무계획적으로 보이는 방식을 택한 것에 대한 소외감과 끝없는 회의감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잠시 성실하게 살았던 과거를 나를 떠올리며 다시 그때처럼 살아볼까 결심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그때마다 마음을 붙잡았던 건 '쓸모없음의 쓸모'를 깨닫게 해 준,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무엇도 될 수 있는 공백의 시간들이었다.


   하얗게 지새우던 밤, 몸이 늘어질 때까지 뒹굴던 방바닥, 까닭 없이 가라앉는 기분의 끝까지 내려가 보는 것.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모든 무용한 것들이 내 글의 힘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서라면 성실을 힘쓰지 않아도 글 앞에서는 별안간 성실이 발동되어 쓰는 이상한 글을 마무리하며. 이제는 그저 이렇게 생각한다.


   다만 그런 삶이 나에게 맞으면 되었다고. 불성실이 나에게 성실이면 되었고 쓸모없음이 나에게 쓸모 있음이라면 그만이라고. 누군가 내게 다시 “너는 매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라고 물으면 이제는 의연히 대답하고 싶다.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생각을 해."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your_dictionary 
*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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