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리시안셔스
스물일곱 번째 마음,
12월 31일 밤
의진: 누나, 책 잘 받았어. 연락이 너무 늦었지. 요새 경황이 없었어. 미안해.
나: 무슨 말이야. 늦으면 뭐 어때. 덕분에 새해 인사도 할 수 있게 됐는데. 책은 다친 데 없이 잘 갔어?
의진: 응. 책은 무사히 잘 왔어. 누나 책 보니까 진심으로 기쁘다. 고마워.
나: 나도 고마워. 경황이 없어도, 경황이 없는 걸 핑계로 우리 종종 연락하자.
1월 1일 새벽
아라: 언니, 해피 뉴이어
나: 아라도 해피 새해. 맞다. 그때 스케이트는 타러 갔어?
아라: 아직.
나: 그럼 나랑 타러 가자.
아라: 그래! 언제?
나: 오늘?
아라: 좋아!
1월 1일 낮
아라: 나 도착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오늘 공휴일이라서 그런가 봐.
나: 그럼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할까?
아라: 그래. 저 사이에 줄 서있어보려고 했는데, 애들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어.
나: 잘했어. 너 줄 서있다가 애들이랑 싸우면 어떡해. "내가 먼저 왔어!"
아라: ㅋㅋㅋㅋㅋㅋ
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라: "엄마한테 이를 거야!"
나: "나도 엄마 있어!"
아라: "우리 아빠 나이 많아!"
나: "우리 아빤 환갑이야!"
1월 2일
기억이 나지 않음
1월 3일
기억이 나지 않음
1월 4일
윰: 버금뻐끔
나: 윰윰
윰: 나 프사 사진 골라줘. (내가 사인해준 책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나: ㅋㅋㅋㅋㅋㅋ 그래, 잠깐만. 음.. 위.. 위에꺼!
윰: 오키. 근데 왜 사인에 '하나뽄인 윰' 이라고 썼냐.
나: ...
윰: 근데 오히려 틀려서 인간적이네.
나: 역시 그렇지?
1월 5일
꽃을 보내주었다.
생화로 된 꽃다발을 마지막으로 받은 건 대학교의 졸업식 날에서였다. 생전 처음 입은 졸업 가운과 학사모가 어색해 허둥대고 있을 때, 요란한 축하 인사와 함께 꽃다발들이 품에 안겼다. 겹겹의 포장지 사이로 말간 얼굴을 한 꽃송이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꽃다발은 사진을 환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주고서 며칠 사이에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때 꽃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을 두고 오래 후회했었다.
며칠 전, 흰 종이에 싸인 꽃다발 한 아름을 받았다. 꽃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리시안셔스라고 말했다. 그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입 안에서 여러 번 굴려 발음했다.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
처음 꽃을 받은 건 초등학교 졸업식에서였다. 그 전에도 한 두 송이쯤은 특별한 날에 주거나 받아보았을 테지만 축하의 뜻으로 내 소유의 꽃다발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 손으로 받아 품에 폭 안아 본 꽃다발은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으면 분명 이 꽃이 제일 예쁘게 나올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들과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 차 뒷좌석에 무심코 놓아두었던 꽃다발을 들어보니 꽃잎 끝이 메말라 시들어있었다. 차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가느다란 꽃의 고개가 맥없이 흔들렸다. 놀란 목소리로 엄마에게 꽃이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엄마가 대답했다.
"집에 가서 꽃병에 꽂아두면 괜찮아져."
"괜찮아지면 다시 살아나는 거야?"
"며칠은 간다는 말이지."
"그럼 며칠 뒤엔 죽어?"
"그럼, 뿌리가 없어서 오래 살지는 못 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막 피어난 것처럼 싱그러웠던 꽃이, 목이 잘린 생명처럼 품 안에서 속절없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꽃다발을 받는 일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꽃은 꽃병 안에서 천천히 시들어가다가 어느 날엔 꽃병 채로 치워졌고 다시 어느 날엔 꽃대와 잎이 정리된 채로 쓰레기통 안에 버려졌다. 나는 그때 꽃에게 마음속으로만 미안하다는 인사를 했다.
리시안셔스를 목이 긴 꽃병으로 옮겨주었다. 책상 한 켠에 올려둔 꽃은 제 자리가 그 자리였던 것처럼 머물렀고 문을 여닫을 때에는 인사 대신 향기로 맞아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꽃의 향이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는 몰랐다. 꽃이 머무른 자리를 간직하거나 혹은 정리하는 방법 또한. 작별이라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꽃 한 송이더라도.
일 년 전에, 나는 한 사람과 헤어졌다. 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이 예고 없이 다가온다는 점에선 같지만, 그를 만났어도 보내는 법은 끝내 알지 못했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사실 그를 미워한다고 말해야 할까. 이제는 그가 싫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새까맣게 뒤척이던 밤, 앓았던 말들을 마음의 이름으로 옮기느라 꼬박 사전 한 권을 썼다. 그리고 어제, 꽃을 보내주었다.
꽃을 보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제 곁을 내주어 향기로운 시간을 선물해 준 꽃에게,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로. 리시안셔스를 보내며 나는 그를 함께 떠나보냈는지도 모른다. 혹은 끝내 보내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떠나보냈는지도. 당신의 곁을 내게 나누어주어 참 고마웠다고. 그러니 부디, 잘 가라고.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 your_dictionary
* 그리고 사진 ⓒ 2nd_ro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