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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Feb 05. 2019

그렇게 살게요, 할머니



스물여덟 번째 마음,

소망하다



  집 근처의 카페를 가던 길이었다. 평소처럼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가고 있는데 지팡이를 짚으신 할머니 한 분이 뭔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는 모습이 보였다. 찾으시는 게 있 싶어 여쭈어볼까 하다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걸까  대뜸 말을 붙이기가 망설여졌다. 대신 도움이 필요하면 물어오실 수 있게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바쁠 것 하나 없어 뵈는 한량의 모양새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으려니 예상대로 곧 나를 불러세우셨다.


  "학상, 여그가 햄버거 집인가 피자 집인가?" 할머니가 가리킨 '집'은 도미노 피자 가게. 네, 할머니. 여긴 피자 집이에요. 하고 말씀드리니 여 근처 어데메가 햄버거 집이었든 거 같은디... 하고 말을 흐리신다. 아, 햄버거 집은 저 아래 사거리에 있어요, 하고 방향을 가리키는데 쭉 내민 손가락을 쫓는 할머니의 눈매가 가물가물했다. 아무래도 길을 모르시는 눈치라 같이 가드리는 게 나을 듯싶어 근데 마침 저도 그쪽 가는 길이어서요, 저랑 같이 가요, 하고 할머니의 발을 이끌었다.


  나는 할머니보다 조금 느리게 걸으려 하고 할머니는 그런 나보다 조금 빠르게 걸으시려 하는 요상한 엇박자에 맞추어 잠시 나란히 걸었다. 할머니는 햄버거 가게를 한참 찾으셨었는지 내게 하소연을 하셨다. 간판이 죄 꼬부랑글씨로만 써있은게 나는 밖에서 봐도 모르겄어, 아이고, 추운데 오래 찾으셨었나 봐요, 분명 근처에가 있든 거 같아 찾아봤는디 암만 봐도 없어야, 벌써 이래 눈이 흐려졌나 보다 했지, 에이 아니예요, 여기 길이 비슷비슷해서 저도 자주 헷갈리는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햄버거 가게 앞에 도착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된다고 알려드리고서 가려는데 생각해보니 키오스크 주문이 어려우실 것 같아 같이 들어가드렸다. 이왕 해드리는 거 방법도 알려드리면 더 좋겠지 싶어 욕심을 내어 하나씩 짚어드렸다.


  할머니 이거 되게 쉬워요, 여기 이렇게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돼요, 하는데 화면에 뜨는 글자가 테이크아웃, 세트 메뉴, 사이드 메뉴 등 전부 영어였다. 내가 할 때는 멈칫한 적이 없었는데 할머니께 알려드리며 하다 보니 매 화면마다 당황하면서 손가락을 칫거려야 했다.


  죄송해요, 좀 어려우시죠... 이게, 어, 요즘 인건비가 비싸서 기계가 대신 주문을 받는 건데... 하고 변명 아닌 변명까지 붙이다 보니 설명만 더 장황해졌다. 젊은이야 기계가 편리하니 좋지, 요즘 사람들은 다 핸드폰 들고 있고 나는 배워도 배워도 모르겄어. 할머니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 게임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텐데. 내가 저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어오셨다가 한참 서성이다 가셨을까 봐 마음이 철렁했다.


  이렇게 혼자서 햄버거 가게를 찾아오실 정도면 햄버거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다음에 혼자서 주문하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할머니, 다음에 또 오시면요... 하고 자꾸만 설명을 늘어놓는 내게 할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인자 올 일이 없응게 괜찮여, 돌아가신 양반이 햄버거를 좋아혀서, 상에라도 올릴라고 나왔지..."


  돌아가신 양반, 상에 올린다, 는 말들로 멀리까지 햄버거 가게를 찾으러 나오신 이유가 뒤늦게 짐작이 되었다. 남들이 들으면 숭 보지, 그런 걸 다 올린다고, 하시기에 아니예요, 저희 집은 양념 치킨도 올리는데요, 순살로요. 하고 말씀드리니 그랴? 하고 놀라서 물으다. 그럼요, 좋아하셨던 거 올림 됐죠 뭐, 저희 집은요, 그 옆에 콜라도 따라서 놔요. 하고 시시콜콜한 사연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니 입을 가리고 슬몃 웃으셨다.


  곧 봉투에 담겨 나온 햄버거를 할머니께 건네며 살펴 가시라 인사를 드리는데 할머니가 다시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며 손을 꼭 잡았다 놓으셨다. 가게를 나서는 길에 습관처럼 이어폰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면서 가는 대신 오늘은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서 걷기로 했다.


  이어폰을 꽂지 않고 걸어본지 오래돼 조금은 귀가 휑한 기분으로 걷는데 어색할 틈 없이 곧 소리들이 귀를 메워왔다. 아이를 부르는 소리, 발자국 소리, 가게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바람 소리, 신호등의 신호음 소리, 웃음소리, 버스에서 치익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 사람의 소리, 사람과 사람의 소리들 귀에서 눈으로, 눈에서 마음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내가 할머니에게 길을 알려드린 게 아니라, 사실은 할머니가 내게 길을 알려주신 걸지도 모른다고. 걸어가는 내내 새해의 해 아래에서 그런 다짐을 했다.



  올해는 더 많은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더 많은 말을 귀담아 들어야지


  더 많은 얼굴을 눈에 담고

  더 많은 사랑을 말해야지


  그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살아야지



  





* 올해의 소망을 기록하며
* 말글  your_dictionary 
*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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