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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Feb 17. 2019

공연한 부끄러움이 나를 찾아올 때



스물아홉 번째 마음,

공연하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달라진 점은 이따금 작가로 불린다는 사실과 이따금 내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이따금이란 단어 아래 포섭되는 이런 일들은 그러므로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란 사실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그럴 때마다 자주 부끄럽고 가끔 뻔뻔해진다는 것. 요즘의 나는 부끄럼과 뻔뻔함의 시소에서 뻔뻔의 쪽으로 기울어지기 위한 연습하고 있다.     


  내게 글을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서는 '책을 쓴다면 내놓았을 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책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의 도리' 라 말씀하셨다. 읽는 사람이 누구든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도록,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조금의 부끄러움도 남지 않게끔 맹렬히 쓰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서 글을 썼다. 잘 쓰는 것보다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 먼저라 생각했다. 독립출판을 준비할 때, 책이 인쇄되기 직전까지도 과연 책으로 나오기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썼는지를 스스로에게 매 순간 물으며 답을 구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  출간이 다 마무리 된 지금에서야, 때늦은 부끄러이 종종 찾아온.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속절없는 부끄러움이다.

  

  에세이라는 장르 특성상 나의 책 안에는 나의 이야기들이 빼곡히 담겨있다. 그마저도 '곰돌이 푸' 책처럼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 고 노래하는 마냥 예쁜 이야기도 아니다. 책에는 방황, 우울, 고민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다 담겨있어 한 번만 읽어도 나라는 사람이 대강 파악이 되는 것은 물론, 집의 가족 구성원과 키우는 고양이와 고양이의 이름이 뭉치인 것까지도 알게 된다. 그러니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글을 읽고 나면 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 또한 다른 작가님들의 책을 읽고서 그런 생각을 가졌었으니까.


  공연한 부끄러움은 그 괴리에서 생긴다. 나의 책을 읽은 누군가를 만나면,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면,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조심스러워진다. 실제로 나를 알고 있진 않지만 책을 읽어 자연스레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많은 주의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능청스러움을 요한다. 생각보다 활기차세요, 생각보다 차분하세요, 의 말을 들으면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어떤 환상 같은 걸 깨뜨린 것 같아 부담까지 든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깨부수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죄송합니다.


  그런 상황들을 몇 번 겪은 지금은 가만히 있다가도 누군가 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문득 생각하면 공연한 부끄러움이 불쑥 든다. 이런 부끄러움은 여러 번 반복한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고 글을 더 잘 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럴 때마다 남몰래 쓴 내 일기장을 내 손으로 만천하에 열어보인, 대책 없이 솔직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조금의 원망을 느낄 뿐이다.

 

  아무리 에세이라도 그렇지, 대체 어쩌자고. 친구한테도 말 안 했던 별 시시콜콜한 것들을 다 떠벌리고 다니다니! 차라리 '황금 같은 20대를 보내는 비법', '떼돈을 버는 10가지 철칙', '당신만 모르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같은 책을 썼더라면 제법 멋졌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 그러나 그런 것은 나의 취향과도 기호와도 영 맞지 않는 일. 내가 쓸 수 있는, 쓰고 싶은 글을 썼고 부끄럽지 않게 썼다면 결국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태연함을 기르는 것도 책 낸 자의 몫일 테다.


  그래서 나는 뻔뻔의 쪽으로 기울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책 잘 읽었다, 고 인사하는 사람에게 쑥스러움의 손사래를 부지런히 치는 대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연습. 책에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가족들은 책을 읽고 어떤 말을 하셨는지, 묻는 사람의 초롱한 눈동자를 보았을 때 어떤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들려주어 그 초롱함을 지켜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과 한바탕 내적 갈등을 하는 연습.


  전에는 그럴 때 인류애적인 강력한 의무감이 앞서 적당한 말로 둘러댔지만 요즘은 솔직한 말을 털어놓기도 다. "ㅅ... 사실 제 동생은 제 책 읽어보지도 않았어요..." 와 같은 말들을 는 식이다.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라도, 일상의 대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고 지루할 만큼 평범하니까. 그런 사람의 삶은 뭔가 좀 다를 것이라는 공고한 환상을 지키는 대신 나 또한 별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글과 책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글이 책이 되는 과정의 표면과 이면의 의미 모두를 느낀다. 표면의 것은 파일이라는 무형의 종이 안에 써넣었던 글자 인쇄하고, 낱장으로 인쇄된 면면을 한데 묶어 제본하고, 그것에 표지를 씌우고 이름을 는 것. 그리고 이면의 것은 나의 글이 책으로 만들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읽힐 만한 것인지에 대해, 과연 조금의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없는지 스스로에게 매 순간, 끊임없이, 계속해서, 묻는 일이다.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것이 글의 일이라면 책의 일은 공연한 부끄러움을 차라리 남김 없이 받아들이는 일 같다. 대체 어쩌자 다 떠벌리고 다니는지, 이불을 뻥뻥 찰 만큼 후회하면서도 자꾸만 투명한 말을 하고 갈수록 맹물같은 사람이 되는 오늘의 글처럼 말이다.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your_dictionary_ 
*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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