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마음,
걷는 것을 좋아해 하루에 두 세 시간씩은 매일 걷는다. 따로 시간을 내서 걷기보다 가까운 약속 장소는 걸어갔다가 걸어오고 먼 약속 장소는 버스를 타고 갔다가 걸어서 돌아오는 식이다. 걷기에 처음 취미를 붙이게 된 건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을 쓰면서부터였다.
걷는 건 좋아해도 길눈이 밝지는 않은 탓에 지도를 보는 습관을 들이기 전엔 자주 엉뚱한 곳을 헤맸다. 몇 번 오갔던 데는 눈에 익은 길로 대충 찾아다녔지만 전혀 모르는 곳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불확실한 감각에 의지해 낯선 길을 헤맸고, 아까운 시간과 걸음을 허비했다.
나중에는 그 낭비를 아끼려 눈에 불을 켠 채로 표지판만 보고 걸었던 적도 있었지만, 자동차용 표지판의 간격은 가까워야 500m 쯤. 그 공백의 500m 가량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이 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불안에 그 다음 표지판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발을 놀려야 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분으로 누리고 싶은데 잔뜩 긴장해 힘만 쓰고 다니려니 취미가 도리어 고생스러워진 것 같았다.
결국 아는 길은 아는 길로 다니고 잘 모르는 길은 무조건 스마트폰 어플의 도움을 받아 걸어 다니기로 맘을 먹었다. 매번 아는 길로만 다니는 게 지루하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보고 걸을 땐 주야장천 그것만 보고 걸어야 해서 주변을 보며 걷는 재미가 조금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행하듯이 일상을 살 수는 없으니까.
최단 거리는 물론 도착 예정 시간까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스마트폰을 이용하면서부터 헛된 데에 힘을 쓸 일이 줄어 훨씬 편했다. 그 뒤로 걷는 데 취미를 붙여 가까운 곳은 가까워서, 먼 곳은 멀어서라는 이유로 몇 년 동안 편리함을 누리며 살았다. 불과 며칠 전에 그 오랜 습관 때문에 낯선 곳에서 길을 잃게 되기 전까진.
한 시간 반 거리에 떨어진 카페를 가려고 나선 길이었다. 연남동에서도 구석, 카페들이 밀집되어 있는 길에서 한참 외떨어진 데에 숨어있는 곳이어서 꼭 한번 가보려고 벼르고 있던 카페였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어플로 길을 확인하니 꽤 돌아서 가야 하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로 안내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복잡해 그냥 지도를 보면서 갈 생각으로 큰 길만 대강 확인하고서 집을 나섰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라 한낮의 날씨가 꽤 포근했다. 그동안 핸드폰을 들고 걷기는 손이 시려워 주머니에 넣고 잠깐씩만 꺼냈는데 그 날은 모처럼 손에 들고 걸어도 괜찮을 정도였다. 연남동 초입의 골목길까지는 익숙한 길이라 마음이 가벼워 오랜만에 친구와 카카오톡으로 수다도 떨고 게임도 한참 하면서 여유롭게 걸어갔다.
골목길 입구에 다다랐을 때쯤 여기서부턴 슬슬 지도를 보면서 가야지, 하고 스마트폰의 화면을 넘겼는데 상단에 배터리 경고등이 빨갛게 떴다. 한 시간 가량을 걸어오면서 내내 켜놓고 있었더니 그새 배터리가 닳아 2%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언제 이렇게 배터리가 닳았지?' 하고 놀랄 틈도 없이 급하게 지도를 켜 캡처부터 했지만, 그마저도 스마트폰이 꺼지면 도루묵이 될 일. 스마트폰의 숨이 붙어있을 때 어떻게든 길을 외워두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여기로 들어가서 오른쪽, 편의점 있는 삼거리에서 다시 왼쪽, 거기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고, 길 끝에서 다시 오른쪽....
집중해서 외워도 헷갈릴 판에 마음이 급하니 외워도 외워도 처음 본 길 같았다. 한 번만 더 보면 외울 수 있을 거야, 달래며 두뇌를 풀가동하려는데 화면이 곧바로 힘없이 꺼져버렸다. 검은 화면 위로 망연자실한 얼굴이 비쳤다. 모르겠다, 일단 아까 봐 둔 편의점으로 가보자, 하고 터덜터덜 골목길로 들어섰다. 다행히 코 앞에 바로 편의점이 보였다.
좋아, 저기 편의점이 보이긴 하는데, 근데 잠깐만, 저 삼거리에서 어느 쪽이었더라? 셋 중의 하나일 확률로 가운데 길로 주춤주춤 들어갔는데 몇 발자국 못 가고 그대로 되돌아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올 땐 분명 괜찮았는데 스마트폰이 꺼진 걸 안 뒤로부터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다. 지도 없이 모르는 길을 계속 가야 하는 것도 사실 무서웠다.
결국 그냥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나 가는 걸로 계획을 바꿨다. 다시 다른 길을 택해서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10분을 넘게 들어가도 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또 잘못 들어왔나 봐, 끝까지 가면 카페가 나오긴 나오나? 그러다 엄청 멀리 가서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그땐 어떡하고, 가뜩이나 길치인데... 다음 골목, 그다음 골목을 헤맬수록 걱정이 늘어갔다.
무용지물이 된 스마트폰 때문에 대체 몇 분을 걸었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헤맸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길 사이에서 맴을 돌던 중, 우연히 카페같이 생긴 어느 한 곳을 발견했다. 간판과 창문이 없어서 밖에서 보기에는 여기가 카페인지 아닌지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항상 스마트폰으로 미리 봐둔 카페만 찾아가다가 전혀 모르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괜스레 겁이 나 문 앞을 서성였다. 나무로 된 두꺼운 문 가까이로 다가가 귀를 대보았다. 희미한 음악 소리가 같은 게 들렸다. 그 소리에 용기를 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조금씩 커지던 음악 소리가 곧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져왔다. 어서 오세요. 어디선가 낮은 인사 소리가 들렸다. 불규칙적인 크기의 테이블들과 높낮이가 다른 의자들이 어지러이 놓여있는 카페였다.
커피를 주문하고서 군데군데 놓인 화분과 조각상, 담요, 바구니, 꽃병들을 피해서 지그재그로 걸어가 앉았다. 푹 꺼진 의자에 등을 묻는 순간에 아주 먼 곳에서부터, 어렴풋한 깨달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 곳에 오기 위해 길을 잃었던 것 같다는, 그런 깨달음이.
모험하며 살고, 여행하듯 살기엔 시간은 한정적이고 삶은 끝없이 불안한 길이다. 일상이 여행일 수 있을까. 혹은 여행하듯이 자유롭게 방랑하며 살 수 있을까. 그 두 물음에는 분명하게 아니라 믿으며 살았다. 낯선 길로 가면 반드시 헤매게 될 테고 그 길 위에서 분명 숱한 시간과 걸음을 낭비하고 말 테니까. 삶을 헤매는 시간은 모두 탕진이고 낭비였다.
도로의 표지판 대신 몇 년의 간격으로 놓인 시간의 표지판들을 따르며 안전하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 여겼다. 어떤 게 나의 길인지, 지금 이 길이 맞는 길인지를 따져볼 틈 없이 앞서 가는 사람과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사이에 끼어 잠시도 멈추지 못한 채로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분명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이제 와 그 시간들이 과연 낭비하지 않은 시간이었는지 물으면 그 물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조금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낭비하며 살아왔던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안규철 작가님은 '아홉 마리의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이란 저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의 올해 소망은 세상의 일들로부터 한발 물러나 나의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해 온전히 낭비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꿈꾸었으나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에 더욱 간절한 소망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언제나 낭비하는 쪽이었다. 그것은 걸음일 때도 있었고 꽃이었을 때도 있었으며 글이었던 때도 있었고 사랑일 때도 있었다. 영원을 믿듯 탕진하여 결국 헛되어버린 것을 두고 앓았었으나 사랑했던 순간을 두고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낭비하고 탕진하며 헤매었던 시간들만이, 나를 먼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연남동의 좁은 골목길, 방향도 시간도 모른 채 헤매던 길 위에서 나는 지도 없이 길을 찾는 방법 하나를 깨달았다. 길을 찾기 위해서는 기어코 길을 잃어야 한다는 것. 낯선 길 위를 헤매며 딛는 걸음들이 모여 새로운 길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길이 반드시 가장 좋은 길이란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 길은 적어도 내가 선택한 길이란 믿음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니까.
우리는 다시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다시 어디를 가기 위해 어디서 길을 잃어야 할까. 다가오는 봄에는 종이 카메라를 들고 먼 벚꽃 나무 동산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당신과 오랜 시간을 낭비하고 싶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숱한 걸음을 낭비하고 싶다. 그곳에서 길을 잃기 위해, 가진 모든 시간을 기꺼이 탕진하고 싶다.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 your_dictionary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