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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Mar 06. 2019

마음의 시계는 각자의 시간으로 흐른다



서른두 번째 마음,

속상하다



  생각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도 못한 물건이 나오면 놀랍고 반갑다. 가령 창고에서 오래 된 장난감을 찾거나  주머니에서 꼬깃한 만 원짜리를 발견할 때처럼. 가끔은 서랍에서 중학생 때 썼던 일기 따위를 발견해 허공에 발차기를 할 때도 있지만 한바탕 발차기가 끝나면 다시 고이 접어다 깊숙이 보관해둔다.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흑역사라도 (그리고 앞으로도 볼 생각은 추호도 없더라도) 그 물건에 깃든 오랜 기억까지 버리기는 어쩐지 아깝고 속상한 마음이 들어서다.


  지난 주말에는 슬슬 봄 옷을 꺼내 두려 날을 잡고 옷장을 정리했다. 그렇게 입을 옷 없다, 없다 하면서도 대체 어디서 옷이 그렇게 솟아 나오는지. 미니멀리스트는 다음 생에나 가능할는지 한 트럭에 가까운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 정리했다. 그래도 몇 년 묵은 옷들은 좀 버려야겠지 싶어 박스를 한참 헤집는데 옷 사이에서 손바닥 만한 분홍색 옷이 빼꼼히 보였다. 이 옷이 여기 있었다는 게 너무 반가워 앞뒤를 여러 번 뒤집어봤다. 오 년 전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난, 우리 집 강아지가 입던 옷이었다.


  그 강아지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때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함께 살았던 강아지로, 10년은 훌쩍 넘게 함께 살았던 우리 집 막내였다. 사람 나이로는 호호 할머니에 가까운 나이여도 우리 집에선 언제나 애기와 귀요미와 애기 귀요미의 담당이었다.


  강아지의 이름은 '방석' 이었는데 이름이 뭐 그런고 하니, 처음 데려왔을 때 보았던 모습이 마침 납작 누워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 90도 칼각을 이루 직사각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 네모 반듯한 모양이 흡사 방석 같아 방석이라고 지었다. 정말 그런 이유로 강아지의 이름을 방석으로 짓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싶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당시 초딩이었던 나와 동생이 지은 이름이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얘 누워 있는 거 봐, 진짜 방석 같아.", "진짜 방석 같으니까 진짜 방석이라 부를까." 하는 자매의 대화에 "삼천갑자 동방삭 같이 들리니 뭐 오래 살 거 같아서 나쁘지 않네." 하고 아빠도 슬몃 동의를 해주었다. 대체 방석이 어떻게 동방삭으로 들릴 수 있는지 그것 참 꿈보다 해괴한 해몽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 이름을 그리 붙이게 되었다. 정말 이름이 그래서인지 방석이는 오래 살았다. 아픈 곳도 없이, 언제나 있어줄 것처럼 살았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아픈 곳들이 생기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눈이 조금 탁해지고 이빨이 약해진 것 같아 병원에 데려갔더니 자연스러운 노화의 증상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사료로 바꾸어주고 안약을 넣어주며 돌보아주었지만 큰 차도없었다. 방석이는 점점 뛰어놀지 않으려 했고 침대에 뛰어오르는 것도 자주 주저했다. 우리 집 애기 강아지가 할머니 강아지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노화에는 어떤 명약도 쓸 수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몸이 더 약해지면서부터는 방석이가 체온 조절을 잘하지 못했다. 건강했을 땐 늘 시원한 현관 쪽에 가서 누워있곤 했었는데 이불 안에 눕혀두어도 자꾸만 몸을 떨었다. 그동안은 불편할까 봐 옷이나 신발 등을 잘 입히지 않았었지만 그때는 얼른 따뜻한 옷을 사와다 입혔다. 귀여운 분홍색 돼지가 그려진 줄무늬 옷이었다. 힘이 없는 와중에도 낯설고 싫은지 옷을 입히려고 하면 도망을 가 나와 동생이 달래고 혼내가며 겨우 옷을 입혔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동물병원의 수술실에서 방석이의 옷을 다시 벗겨주어야 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 내가 본 방석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때 방석이에게 입혔던 옷을 어떻게 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옛날 옷들 사이에서 그 옷을 발견하기 전까진. 정신이 없어 챙기지 못했을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 옷이 여태 여기에 있었단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앞뒤로 여러 번 뒤집어서 보고 얼굴을 묻고 냄새도 맡았다. 희미하지만 방석이 냄새가 났다.


  더 살펴보니 그 무렵 내가 입었던 옷들에 방석이 들이 몇 가 붙어있었다. 털 빠진다고 그렇게 애를 붙잡아다 빗질을 시키고 옷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방석이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마음 한쪽이 짠해지면서도 발견한 게 기뻐 얼른 동생을 불러다 방석이 옷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옷이 아직도 있냐며 신기해하다가 방석이가 이걸 얼마나 입기 싫어했는지, 그런데도 애가 착해서 입혀놓으면 또 얼마나 얌전했는지, 참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였는지,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다 유난히 방석이를 예뻐했던 아빠에게도 보여줄 생각으로 거실 의자에 방석이 옷을 걸어둔 채로 깜빡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거실로 나가 보니 방석이 옷이 어제 놓인 모양 그대로 놓여있었다. 방석이 옷 놔둔 거 봤냐고 아빠한테 물어보려다가 학교 가고 뭐 한다고 바빠서 그대로 두고 나갔다. 그러다 밤에 돌아와서 거실 의자 위를 봤는데 방석이 옷이 없었다. 동생한테 물어보니 아빠가 치웠다고 말을 흐렸다. 어디다 치웠냐고 물었더니 조금 머뭇거리다 개 옷 쓸데도 없는 거 뵈기 싫게 놔뒀다며, 아빠가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순간 화가 마구 치밀어 바로 아빠한테 서 소리를 질렀다. 아빠, 방석이 옷 버렸다며! 그게 그냥 개 옷도 아니고, 방석이 옷인데. 마음에 안 들면 가져가라고 하던가! 다시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버리냐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데도 아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혼자서 계속 성낼 수는 없어서 결국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쓰레기통을 뒤져다 그 옷을 찾아와야 하나 궁리하고 있는데 동생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넌 뭐했냐, 아빠가 버릴 거 같으면 네가 미리 챙겨야지, 화살을 동생한테 돌리려는데 동생이 말했다. 그게 사실, 아빠가 속상했나 보다고. 속상해서 그냥 못 본 척하려다가 못 본 척도 못하겠어, 결국 버린 거 같다고.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화가 잔뜩 나 부풀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개 주워오면 내다 버린다던 아빠는 방이를 유난히 예뻐했더랬다. 내가 그랬으니까 아빠도 반갑고 좋아할 줄 알고 옷을 가져다 두었. 그 옷을 보면 방석이 생각이 나고, 그래서 마음이 아플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빠한테 소리 질렀던 말처럼 그 옷은 그냥 개 옷이 아니고 방석이 옷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을 거다. 괜찮아지는 일에는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그 옷을 보고 반가웠으니 아빠도 반가워 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아빠한테 소리만 빽빽 질렀다.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뒤늦게 아빠에게도, 동생에게도 미안해졌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방문을 닫고 앉아서 잠깐 울었다. 아빠의 마음은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이유로 하나뿐인 방석이 옷을 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속상하다. 어디 잘 보관해두었다가 보고 싶을 때 꺼내서 만져보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빈자리를 쓸어보다가 옷에 붙어있던 방석이 털 몇 가닥을 주워 작은 핀 케이스 안에 넣어두었다. 간직할 줄은 모르고 훨훨 보낼 줄만 알았던 우리 가족방석이가 여태 기다려주었던 흔적이니까. 옷은 버렸지만 털은 이렇게 간직할 수 있어 다행이. 언젠가 우리 강아지 보고 싶을 때, 가끔 꺼내서 만져라도 보게.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your_dictionary_ 
*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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