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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Mar 11. 2019

할머니는 투게더를 두꺼비라 불렀다



서른세 번째 마음,

그립다



  우리집에는 TV가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쭉 없이 살고 있으니 한 15년쯤 되었나 보다. TV를 보지 않 지낸 뒤로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몇 년 느린 시간에 살고 있단 사실 빼곤. 새로 데뷔한 연예인이나 아이돌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 개봉한 영화나 유행하는 상품도 잘 모른다. 팟캐스트라던지 SNL 같은 신생 방송 쪽은 더욱이 문외한이다.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요즘의 문화'에서 멀어져서인지 영상을 보는 일 자체에 흥미가 줄었다. 모르는 유행어가 늘었고 개그 코드를 따라가지 못해 어쩌다 우연히 예능 방송을 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 불편한 건 아니지만 가끔 걱정이 됐다. 나 이러다 문명과 영영 멀어지면 어떡하지, 어느 날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는 친구가 말했다. "야, 너 이 할머니 영상 보면 웃지 않곤 못배길 걸!"


  처음 박막례 할머님을 알게 된 건 친구의 추천을 통해서였다. 요즘 아주 핫한 할머님이 있다며 나에게 유튜브 주소를 알려주었다. '요즘 것들의 메이크업' 이란 썸네일에 화려한 화장을 하신 할머님의 모습에 홀려 빠져들 듯 영상을 봤다.


  다른 전문 뷰티 유튜버처럼 편집이나 연출이 근사거나 화장 기술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문제가 아니었다. 구수하고 푸근한 말투, 친근한 옷차림과 어쩐지 발랄하게 들리는 '염병' 이라는 욕까지. 나도 모르는 '요즘 것' 을 몸소 알려주시는 할머님의 영상을 보면서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한 영상을 다 보고서는 다음 영상, 그다음 영상까지 연달 보다 할머님의 인스타그램 계정에까지 찾아들어갔다. 이름 '박막례', 생년월일 '1947년 2월 12일생', 자기소개는 '염병하네'. 할머님이 아니면 그 누가 자기소개란에 이토록 대담한 말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손수 올리신다는 피드 곳곳에서 할머님만의 매력들이 물씬 묻어났다. 


  '말이끌랙스여성에날기념화부나와다3월그련되잡지이름핵갈녀죽겄내편들리알아서잘봐주어', '간장비빈국수나만알고인는비밀편드라한번해서먹어봐라윷튜비' 할머님의 암호같은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울세라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댓글로 번역을 달아주었다. '마리끌레르 여성의 날 기념 화보 나왔다 3월, 그런데 잡지 이름 헷갈려 죽겠네. 팬들이 알아서 잘 봐줘, 라는 뜻이에요'


  할머님에게 마리끌레르는 '말이끌랙스' 이고 유튜브는 '윷튜비' 며 팬들은 '편' 이었다. 헷갈려 죽겠다고 농을 하시면서도 '편' 들에게 소식을 들려주기 위해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쓰신 고유하고 특별한 단어들이다. 단어들을 보다 보니 잊고 있던 우리 할머니의 단어들이 문득 생각이 났다. 나의 할머니에게도 할머니만의 특별한 단어들이 몇 있었다.


  아빠가 여섯 남매 중 막내였기 때문에 할머니의 연세가 많으신 편이었다. 해방 전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거쳐 살아오신 분이라 자주 쓰시는 단어들 중에는 다마내기, 요지, 사라와 같은 일본어들이 많았다. 어린 나에겐 그저 수수께끼처럼 들렸던 그 단어들이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는 건 학교에 가고서야 알았다. 모두 지난한 세월이 담겨있는 단어였다.


  시간이 지나고 외래어가 생겨나면서 할머니에겐 영어가 수수께끼 같은 말이 됐다. 대강 들을 수는 있어도 말하기를 어려워하셨던 할머니는 자주 쓰는 영어 단어들은 할머니만의 방법으로 따로 부르셨다. 옆집 강아지의 이름인 '해피' 는 '예삐' 로, 아이스크림 이름인 '투게더' 는 '두꺼비' 로 둔갑되는 식이었다.


   "버금아, 가서 두꺼비 하나 사오니라" 할머니는 아침 목욕을 다녀오시고 나면 꼭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찾으셨다. 그런 날에는 어린 나를 불러 오천 원 짜리 한 장을 쥐어주시며 두꺼비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럼 나는 두꺼비가 투게더를 칭하는 걸로 재깍 알아듣고는 내복 바지 차림으로 달음박질을 쳐 동네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냉동고에서 막 나와 밑면에 살얼음이 그대로 붙은 노란 아이스크림 한 통. 그 주위에 동생까지 세 명이 엉덩이를 붙이고 둘러앉아 숟가락을 바쁘게 놀리던 주말의 풍경. 할머니는 투게더를 두꺼비라 부르셨고 나는 아직도 두꺼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날의 투게더 아이스크림이 떠오른다. '잡지이름핵갈녀죽겄네!' 박막례 할머님의 영상이 그저 좋았던 이유는 그 영상에서 그리운 우리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에게 투게더가 두꺼비였듯 박막례 할머님에게 팬은 할머님의 편이 되었다. 몇몇 단어들은 맞춤법에 맞게 고친 게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래도 팬만큼은 편이라 부르는 게 나는 더 좋다. 편들아, 내 편들아. 당신의 편인 사람들을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천천히 눌러쓰셨을 모습을 상상하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할머님의 곁에는 얼마나 많은 팬들이 할머님의 편이 되어 뿌듯이 지키고 있을까. 그런 모습을 그리면 덩달아 나까지도 많은 편이 생긴 것처럼 마음이 온통 뿌듯해진다.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 말글  your_dictionary_ 
*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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