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소연 Oct 17. 2020

지극히 사적인 나의 독서

연재 프로젝트 #3

독서를 하면서도 그 유익함이라든지, 인류 문화사적 가치라든지, 혹은 지적인 성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편이 아니다. 다른 매체에 비해 책이라는 물성이 우월한지도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분명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화나 드라마가 더 친절하고, 시간과 노력 집약적이며,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파급력이 크지 않나. 점점 더 화면에 익숙해지는 세대의 흐름 속에서 너무 종이만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아집이 아닐까. 저물어 가는 종이 시대의 한가운데, 여전히 책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꽤나 고루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글이 가진 힘은 무섭다. 활자에 많은 사람들은 과도한 신뢰를 부여한다. 펜으로 쓴 것은 무엇인가 확실한 것, 불변의 것,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이러한 권위 때문에 오히려 독서는 어려운 것, 고루한 것, 노잼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본다.

하여 나는 거의 폭로에 가까운, 내 독서의 지극히 사적인 이유를 고백하고자 한다.


책은 어린 시절 하얗고 예쁘장한 남동생에게 빼앗긴 부모님의 관심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80~90년 세대의 전형적인 부모인 나의 젊은 엄마, 아빠는 ‘책 읽는 현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당신들이 낳은 저 작은 피조물이 황희 정승이나 율곡 이이처럼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현주가 책을 읽는구나, 하면 온 집안사람들은 청소기를 돌리라든지, 쓰레기를 버리라든지,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 오라든지 하는 자질구레한 집안일에서 아이를 흔쾌히 면제시켰다. 책을 많이 읽으면 그놈의 서울대를 간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적이 무척이나 중요했던 우리 집에서 부모님이 모르던 한 가지가 있었다. 모든 책이 만물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사실 책을 많이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나 범하는 착각이라는 걸. 책을 신성화하는 것, 절대화하는 것.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나는 부모님의 사각지대에서 순전히 흥미 위주의 서사의 이야기만 읽어댔고, 잔망스럽게도 그 기대를 이용해 텔레비전이 금지된 집안에서 겪는 억울함을 독서를 통해 대신 해소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본 책 속의 세상은 영화 속 그 어떤 서사보다 흥미진진했다. 얇은 한 장의 겉표지만 넘기면 그 속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온갖 불륜 이야기들과 살인, 강도와 같은, 엄마가 하지 말라는 금기가 지천으로 펼쳐져 있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발칙한 상상이 모두 허용되는 그곳. 그게 독서가 내게 갖는 의미였다. 게다가 아주 가끔은 갖가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막장의 대서사를 읽고 있는 내게 어른들이 ‘기특한 현주’, 하며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어주기도 하니, 이런 일석이조가 있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 혹은 금기를 범하는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었다면 고등학생이 된 나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에서 주인공 남녀가 학창 시절, 도서부의 일원으로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흩날리는 커튼 뒤에서 남자 주인공 후지 이즈키(카시와바라 타카시 분)가 책을 읽고 있는 부분인데, 어머나 세상에나 만상에나, 그 배우가 완전히 내 스타일로 생겼던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도서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있어’ 보였던 것이다.

‘나는 반드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도서부에 들어가 학교 도서관에서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으리라! 차분하고 이지적이고 성숙한 신비로운 여고생의 아우라를 뿜어내리라!!!!!!!!!!’ (이왕이면 후지 이즈키 같이 생긴 선배가 있다면...)

라고 다짐했건만 사실상 고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 들어간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을 뿐만 아니라, 천성은 어딜 가지 못하여 차분하... 이지적...... 이런 고급 진 취향과는 아주 아주, 거리가 먼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생이 되면 언니들처럼 키도 쑥 크고, 늘씬한 교복차림으로 긴 생머리를 날리며 다닐 거란 생각은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3년 내도록 아침마다 빗자루를 연상케 하는 반곱슬의 머리와 사투를 벌여야 했고, 키는 중학교 때부터 전혀 자라지 않아 똥자루만 한 데다, 학업에 매진한 탓에(거참 그냥 넘어갑시다) 급격히 찐 살은 여전히 나의 흑 of the 흑역사에 속하는 시절이었으니 책을 좀 우아하게 폼 잡고 읽을 맛도 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샌 것 같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책을 읽은 건 순전히 ‘있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내 모습에, 아니, 종이를 넘기는 내 모습에 취해 있었다고나 할까. 내가 책을 읽는 건지, 책이 내를 읽는 건지 주객이 전도될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책을 읽는 내가 좋았다. 때문에 괜히 어려워 보이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아는 척 지적 허세를 부리곤 했고.

뭐, 대단한 저의라든지, 만물의 이치에 얽힌 지적 호기심 이런 건 단 1%도 없었다.

하여 독서의 이유는 이렇게나 하찮다. 때로는 부모님의 관심을 위해, 때로는 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순전히 지적인 허세를 위해 나는 읽었다. 물론 책은 나를 서울대로 보내지 못했고, 고급스러운 취향의 우아한 지성인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질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으면 그 작은 물성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차분해질 수 있었다. 책 속에는 나와 비슷한 감정선을 느끼고 있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있었고, 때문에 내가 겪는 고뇌가 단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삶의 위태로웠던 순간들마다 얼마나 많은 책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성장할 수 있었던지.

행복한 서사는 내게 따스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고, 완결된 비극적인 서사는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타인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책은 몇 번이고, 몇 번이나 인내를 가지고 내게 보여줬다.

물론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정말로 책이 영화나 텔레비전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지,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읽기 능력은 단순히 독해 능력 외에도 다양한 지적 기능들을 발달시키는지, 정말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지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책이 없었더라면, 나만큼은 지금보다 더 못난 인간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것. 이 작은 물건에 빚진 것은 너무나 많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글이나 씨부리고 있는 것 외에는 없다.


코로나 여파로 벌써 내가 알던 두, 세 군데의 독립서점이 문을 닫았다. 출판사에서는 줄어가는 독서 인구를 우려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책을 읽지 않는다면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마케팅을 한다. 실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돈벌이가 사라져서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공격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처참한 방식으로.

책의 시대는 정말 끝이 났는가. 책에서 위로를 받는 나는 낭만적인 상념에 젖어있는 나이브한 인간인가. 우리에게 팔리는 책이라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 계발서뿐이란 말인가.

어떤 질문에도 웃으며,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흐름에 맞서 싸울 자신도, 이길 자신도 없다.

그러나 나는 계속 읽을 것이다. 가방 속에, 차의 뒷좌석에 소중한 것들을 옹기종기 모아놓고는 말이다.

좋아하는 책, 앞으로 읽을 책, 지금 읽고 있는 책, 어제 산 책, 샀는데 또 산 책을, 지금처럼 쟁여놓고 읽을 것이다.

나는 글이 갖고 있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이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