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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연 Oct 17. 2020

다만 쓰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연재 프로젝트 #4

부침이 심한 날이면 상상 속 작은 서재로 도망쳤다. 다만 읽고 쓰며 살기를 바라는 내가 언젠가는 가지리라 늘 다짐하는 내 안식처였다. 그곳은 한없이 다정하여 못해낼 것 같은 마음, 그래서 바짝 납작해진 못생긴 마음을 어김없이 위로해주곤 했다.

있지 않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상상력은 어릴 때 습득한 능력이기도 했다.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던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이런 습관이 생긴 이유는 알지 못한다. 다만 주변으로부터의 과한 기대와 칭찬, 맏이라는 부담으로 또래보다 가면이 일찍부터 형성된 것은 확실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진짜 내면의 욕망에 대해 솔직해질 수 없는 탓에 누군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편안함에, 나를 온전히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친구든, 애인이든, 내 상상 속이든 간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니 글이 살짝 무거워지는 감이 있는 것 같아 하고 싶은 말로 돌아와야겠다. 옛날이 어쨌든 간에 오늘은 공간 이야기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아직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곳.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위로받는 그런 곳이 있다.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짙은 밤색의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작게 삐걱댔다. 적당한 습도와 적당한 온도, 약간 텁텁한 책 냄새와 조도가 낮은 노란 조명이 크림색의 벽을 비춰 따스하다. 어찌나 작은지 방금 가지고 들어온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도 그 잔향이 이 방구석구석과 책장, 책, 그리고 페이지 사이로 스며들어 온기를 더한다. 더도 말고 딱 두 사람이 편히 앉거나 누워 책을 읽을 수 있는 크기, 안락하다. 삐걱대던 바닥 위로 푹신한 아이보리 색 카펫이 놓여 있어 맨발이라면 그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질 것이다. 물론, 나는 양말도 모자라 슬리퍼마저 덧신고 있겠지만.

가구로는 채도가 좀 바진 빈백 체어나 1인용 소파, 그리고 창문을 향해 서 있는 칠이 벗겨진 크림색, 빈티지한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다. 나는 그곳에 앉아 머릿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대담하고 위험하고 동시에 매혹적인 이야기를 상상한다. 지구에서 가장 다정하고 안전한 곳에서 내가 하는 생각들이 이야기가 되어 누군가를 위로하길 바라며.

추위를 많이 타니 담요나 카디건, 쿠션, 헝겊 같은 것이 있고,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것들은 아마도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걸쳐져 있을 것이다. ‘라이언 맥긴리’가 찍은 벌거벗은 청춘의 사진 포스터가 한 여름의 열기와 습기를 견디지 못하고 모서리가 살짝 안으로 말린 채 벽을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내 사진과 나의 소중한 사람의 사진이 사이좋게 놓여 있어 더 이상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되면 우리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힘을 낸다.

그러고 나서는 오직 책뿐이었다. 그중에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녀 작가이자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요즘 말로 관종이었던 ‘실비아 플러스’의 일기가 있고 폴 오스터의 부인으로 신경증을 앓았던 ‘시리 허스트 베트’의 단편집이 있다. 철학은 좋아하지만 이십 대부터 사놓고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벽돌 같이 두꺼운 러셀이나, 푸코, 아렌트, 지젝, 라깡이 있고, 들뢰즈에 심취해있던 남자에게 빠져 단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작정 샀던 <차이와 반복>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아주 외설스럽다든지, 금지된 사랑을 그려놓은 소설도 간간히 꽂혀 있다. 그때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면 ‘황인찬’ 시인의 시집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거리에 놓여 있고 ‘박준’ 시인은 그 옆이겠지.

투쟁하는 쪽보다는 늘 위로하는 쪽을 선호한 탓에, ‘수전 손택’을 무척 존경하면서도 책 표지의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볼 때면 찔리는 마음 든다. 손이 잘 닿지 않는 가장 구석진 선반에 그녀를 옮겨 놓으며 간신히 시선을 피할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죽기 전에 완독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민음사에서 리뉴얼한 표지가 예뻐 위에서부터 세 번째 칸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눈에 잘 띄는 곳이다. 그리고 내 습작 노트들과 너저분한 메모 쪼가리들과 좋아하는 취향의 크고 두툼하고 기교 없는 투박한 머그 컵 몇 개와 여행지에서 사 온 스노 볼 같은 것들.

그쯤 되면 지금 책꽂이에 꽂혀 있는 토플이니 텝스니 하는 책이나 교육학 관련 전공 서적은 정말이지 제발, 없으면 좋겠다. 언제나 늘 권위적이고 을씨년스럽고 서재의 외관을 해치는 불청객이다. 그들에게 자비 없는 처형을. 대신 희곡집이라든지 영문과 대학시절 들고 다녔던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 Norton Anthology of American Literature는 살아남는다. 헌 책방에서 모은 각종 다른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위대한 개츠비’도 있고 단지 표지가 예뻐서 산 소설도 함께.

사실 이 곳은 서재라기보다는 약간 고물상 같은 느낌인데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왜냐면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이미 치른 중간고사를 다시 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 위대한 작품을 읽고 느꼈던 감동은 그 책을 손에 쥐어보면 여전히 살아 숨 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휘저어 놓은 작품이라면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여름이면 매미가 울고, 가을밤이면 귀뚜라미 소리가 들릴 만큼 땅과 가까운 곳에 그리고 겨울에는 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릴 만큼 조용한 곳에 내 서재가 있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로운 아이가 되어 다만 읽고 쓰는 삶을 산다. 


부디 잠겨 죽어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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