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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연 Oct 17. 2020

메로나

연재 프로젝트 #8

지난여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던 그 친목의 자리가 불편해 도망치고 싶던 적이 있다. 대화가 몇 시간째 내도록 겉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화려한 입담과 무자비한 농담들이 오가는 자리. 칭찬인지 모욕인지 모를 애매한 이야기, 술 탓으로 넘겨버릴 아주 다양한 실수들, 말라비틀어져 접시에 붙어버린 애처로운 안주.

이럴 걸 알면서도 관계에 대한 목마름에 이 자리에 왔다. 대화 속에서 한 일곱 번쯤인가. 낯이 붉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술을 들이켜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춰야 했다. 물론 우리의 말들이 지나치게 가벼운 감도 있었지만, 나의 예민함도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만들리 없었다.

대화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지 못했고, 그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튕겨 나왔다. 괴리되어 있는 단어의 행렬이 서로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있는데, 모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당신들은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이것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의 고독이 조금 나아졌냐고.

만약 이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몽롱한 술집 분위기에 취해 있는 자아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간신히 참아내었다. 결국 우리는 오롯이 혼자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처참했다.


이렇게 외로워질 때면 걸었다. 집보다 세 정거장을 먼저 내려 행인 하나 없는 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꼭꼭 씹으며 걸었다. 훌훌 던져버리자, 잊어버리자, 술도 마셨겠다, 기름 진 안주 탓에 느글거리는 입도 상쾌하게 할 겸, 찾은 것은 메로나.

사실 여름이면 술을 마실 때마다 집에서 한 세 정거장쯤 떨어진 정류장에서 내려 메로나를 사 먹곤 했다. 말하자면 나의 힐링 루틴 같은 거였다. 이 맛만큼은 변함이 없어 나를 외롭게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 한가득인 냉동고 문을 열고, 휘휘 저었다. 여러 메로나 중에 가장 새로 입고된 것 같은, 껍질이 반지르르한 연두 빛깔의 그것 하나를 골라 졸고 있는 편의점 사장님에게 700원을 내밀었다. 늘 보는 얼굴인데도 첨 만난 사이처럼 아무 말 없이 바코드만 찍는 그. 자정 넘어 가끔씩 메로나 하나 달랑 사가는 아가씨가 이상하지도 않은가.

술기운 탓인가, 이렇게 사소한 것들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며 무심한 사장님으로부터 건네받은 메로나를 한 입 깨물었다. 달콤한 맛에 화끈한 마음도 어느새 사그라졌다. 역시 메로나. 이 맛에, 그래, 행복이란 게 별게 있나, 술 마시고 먹는 메로나가 행복이지. 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까 술자리에서 처음 알게 된 인상이 서글한 아이로부터의 문자였다. 언니, 집에 잘 들어갔냐고 그 애가 묻고 있었다. 고작 이 말에 갑자기 그 술자리는 아주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고작 이런 걸로 왔다 갔다 한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장을 하면 조금 스타일 구기는 것 같아, 도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뜸을 들여본다. 메로나는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고 나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른 푹신하고 하얀 내 침대에 누워 나의 안부를 말하고 너도 잘 자, 라는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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