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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연 Oct 17. 2020

누가 촌스럽게 아직도 갑질 하니

연재 프로젝트 #9

모든 관계는 존중과 평등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애인과 애인과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 존중과 평등을 운운하면서 예의 없음을 옹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으니 너는 내려오세요, 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난 우리 사회가 나이, 지위, 돈의 권력에 기대어 甲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돈, 그놈에 돈에 대한 이야기다.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평등함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가?     

지인이 영어회화 선생님을 한다. 유튜브 채널에서 유명하기도 하고 실제로 실력도 좋은 친구다. 이렇게 잘 알려져 있다 보니 모르는 사람에게서 다짜고짜 영어회화 얼마냐는 식의 카톡이 올 때가 있다. 정중함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너는 얼만데?'라는 식은 좀 심하지 않은가.

한 번은 그 애가 여행을 하고 있었고, 회화 강습 문의에 대해 이런저런 사정으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날아온 문자는  

"이거 아주 웃기는 새끼네?"

라는 쌍욕이었다.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돈을 주고 사람을 쓴다는 것. 서로의 이익을 달리하는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늘 아름답기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라는 표현이 너무 위선적이고 자기 합리화 같다면 '알려고 한다'로 바꿔 읽어보자). 하지만 돈을 지불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돈은 이 나라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돈이 다가 아닌 세상, 조금 손해 보면 어떠냐, 는 이야기가 오고 간 때도 있다고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손해를 보는 사람은 '호구'로 불려진다. 그러다 보니, 얼마만큼의 효율을 내느냐가 중요해진다. 500원을 가지고 딱 500원어치의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슈퍼 아줌마를 졸라 이것도 주세요, 저것도 주세요 하는 구매가 가장 현명한 소비가 되는 것이다. 

이런 효율의 극대화는 돈으로 구입한 노동력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경제가 발전한 70년대, 우리나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공장에서 짜내 만든 가발이니 뭐니 하는 것을 내다 팔아 그 원동력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상 논리적 비약이긴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실로 나의 부모세대에게 감사할 일이다. 그들은 불굴의 한국인이다. 그렇게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 온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되었다. 난 그들이 그 시기 최선을 다한 점에 대해서 위대하다고 여기며 감사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볼 때면 답답함을 느낀다. 

'돈 받았잖아? 우리 때는 돈이 된다면 다 했다. 요즘 애들은 너무 나약하다.' 

우리가 결점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당일 약속 취소가 쉬운 세대, 이별도 고하기 힘들어 잠수하는 세대, 하나부터 열까지 손익만 계산하는 세대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당신들의 노력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경험한 세대, 민주주의를 경험한 세대, 물질적인 풍요를 경험한 세대다. 당신들이 당신 자식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하려고 이 악물고 노력해 만들지 않았는가? 

다시 한번, 세상은 변했다. 우리가 돈을 받는다는 것은 비인간적 주종관계를 묵인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돈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신의 종이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받은 그 대가에 대한 정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시민 의식이 성숙했다. 돈을 준다는 이유로 주종관계를 형성하려는 마인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인간은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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