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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Sukwoo May 18. 2016

얘기

2016년 5월 18일

오래 알았고 오래 같은 분야에서 어쩐지 일하고 있는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마감 다음 날은 항상 인쇄 감리를 보러 간다. 지겹도록 마주한 사진과 글을 고해상 이미지의 화면으로 보는 것과 잡지로 인쇄하는 종이로 보는 것은 확인하지 않으면 큰 차이가 날 때가 있기에 하는 작업이다. 그사이 존재할 최적의 접점을 아날로그의 극에 달한 과정으로 항상 배운다.

감리 시간이 예정보다 두 시간 정도 늦어져서 동묘 벼룩시장에 들렀다. 화요일 서울 최고 기온이 27도라고 했다. 아무리 긴소매 옷을 편애해도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에 후드 파카를 입고 다닐 수는 없다. 커다란 빈티지 회색 후드 파카를 사고 싶었건만 마음에 드는 건 찾지 못했다. 대신 몇 가지 샀다. 몇 달 전부터 찾은 90년대 느낌의 캘빈 클라인 진스 Calvin Klein Jeans 로고가 선명한 코치 재킷. 로고만 들어가 있다면, 자수로 새긴 스웨트셔츠가 훨씬 나았지만 관심 없을 때는 오래된 옷이 모인 곳에 제법 보이더니 찾을 때는 사라진다. 타협점이 이 짙은 포도주색 재킷이었다. 혜진이에게 줄 꼼데가르송 트리코 COMME des GARÇONS Tricot 검정 재킷은 지금 매장에 걸린 재킷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만큼 빈티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새 옷처럼 깨끗했고 심지어 1994년에 만든 옷이었다(꼼데가르송 옷들은 내부 꼬리표에 생산연도가 적혀 있다). 인쇄소가 충무로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저녁 먹으며 주었다. 리바이스 Levi's 빅이 big E 데님 재킷도 하나 샀다. 작년에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바람 부는 요즘, 밤에는 입고 다닐 만할 것이다.

밤에 만난 친구는 예상처럼 밥도 먹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갔던 곱창집에 갔다. 그렇게 자주 만나 마시다가 나보다 훨씬 물리적으로 바빠지면서 둘이 무척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처음 한 시간은 지금 친구가 하는 일의 푸념이자 고민이었다. 다음은 내 얘기와 좀 더 사적인 친구의 고민이었다. 그다음 한 시간은 - 서로 2차까지 갈 줄은 몰랐으나 - 친구가 들은 내 얘기였다. 그게 이 일기를 쓰게 했다.

조마조마하고 조심하여 진행한 '일' 관련 얘기에 관한 누군가의 반응을 들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려했던 반응이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좀 무거워졌다. 이러이러하여 저러저러했다는, 변명들이 있지만 그 자리에 털어낸 속내를 포함하여 어쩐지 씁쓸하긴 했다.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지 관여한 다양한 이들의 입맛과 균형을 맞추면서 스스로 정한 기준에 좀 더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데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말과 행동이 점점 싫은 쪽으로 물들고 달라져서 묻기 싫은 때가 더 손톱 사이에 껴서는 '사실은….'이라고 말하는 건 아닌지 싶어졌다. 작은 술집 외부 싸구려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올라온 해물 계란탕에 입도 대지 않았다. 비슷한 분야 사람들이 혹시라도 있을까 괜히 싫어서 그렇지 않을 법한 곳에 갔는데, 옆 테이블 손님들이 '잡지' 얘기부터 아는 이름들을 줄줄이 나열해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깨달은 친구와 나는 눈으로 서로 수긍하고, 사람 이름 대신 대명사를 작은 목소리로 나열하다, 나왔다.

요즘은 다시 생각이 많다. 앞뒤 빼고 말하면 중간에 낀 입장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체감을 한다. 그 사이 자꾸, 풀었다고 생각한 실타래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다시 엉켜있다. 일어나서 보면 좀 부끄럽다고 생각할 이야기들을 여전히 어느 정도는 암호처럼 또박또박 쓰고 고친다. 지금 감정을, 좀 복잡해진 생각을, 결국 진심으로 부딪히지 않으면 차츰 멀어지거나 실망하고 말 관계를, 내일 닥칠 일들을 떠나 써 내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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