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he Essay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ng Sukwoo Nov 04. 2015

그런 새벽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단횡단도 하고, 가끔 오래 걸리거나 피곤할 때는 버스 노약자석에도 앉는다. 특히 후자는 이십 대 내내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 종종 한다.

물론 혼자만의 원칙은 있다. 짧은 건널목의 붉은 신호등일 때 주위 모두가 건너더라도, 미취학 아동이나 아직 '손들고 건너기'를 단단히 배우고 실천할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이 같이 기다리고 서 있으면 아무리 급해도 초록 불을 기다린다. 강원도 태백으로 전학 가기 전이니까 지금은 사라진 홍익대학교 부속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목동이었는데 당시 기억으로 아주 넓은 - 8차선 도로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4차선이었을지도 모른다 - 도로를 내 손 꽉 쥔 할머니와 함께 건넜다. 속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불안해하던 기억이다. 할머니는 이제 거동도 불편하시고 가는 귀도 잡수셨다. 일주일에 몇 번씩 방문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안 계시면 생활이 어려우실 정도가 되었다. 그때는 손주 손잡고 무단횡단하실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이제 나는 너무 커버렸고 할머니는 너무 나이를 드셨다.

지하철 일반석이나 버스 자리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기준은 '내가 보기에' 노약자들이었다. 일단 빼도 박도 못하는, 지금 내 할머니 연배 어르신들은 물론이거니와, 종종 딱 봐도 정정해 뵈는 어르신들은 자리를 양보해도 한사코 거부하실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기준은 부모님이 되었다. 엄마와 아버지와 비슷한가, 더 나이 들어 보이나, 아니면 약간 어릴까. 그 기준을 양보의 척도로 삼기에도, 역시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직접 나를 낳고 기른 '부모님'은 내가 이만큼이나 어른이 되었는데도 어쩐지 어린 듯한 기분을 종종 들게 하니까. 이제 부모님 기준이 아니라, 적어도 열 살은 낮춰 봐야 한다. 나도 더는 스물이 아니고, 지금 스물의 부모님들도 더는 십 년 전만큼 젊지 않다.

요즘 드는 압박은 사실 꽤 좋은 것들이었다. 혼자 일하면서, 이 말 많다고 탈 많다는 업계에서 어느 정도 꾸준할 수 있었고 고민도 물론, 숱하게 했다. 남은 사람들이 행복할까? 모르겠다. 하나 바르다고 생각한 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일단 재미를 잃지 않은 이들이었고 그들에게 퍽 배웠다.

봄인가, 아버지가 지하철역 즈음부터 집까지 걸어오신 날 두어 번 숨이 차서 멈췄다가 겨우 다다랐다고 엄마에게 듣고는, 당연히 아주 많이 속이 상했다. 다행히 누나가 일찍 손주를 둘이나 봐서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부모님이기에 어느 정도 집안의 아들로서 결혼이란 조금 멀찍이 떨어진 존재이겠거니, 스스로 위안 삼고는 했다.

사실 그도 몇 년 전이나 통용될 핑계이긴 했고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이를 드셨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신들이 해준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동안 그래, 뭐, 혼자 어느 정도 커왔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그래서 이제 어디서 라면은 잘 안 먹는다. 중학생 때만 놓고 봐도 물리게 먹었다). 나보다 걱정하시겠지만 어쩐지 표현이 나만큼이나 무딘 엄마에게 보챘다. 아니 병원도 그렇게 할인받아 다닐 수 있는 분이, 할머니만 챙기다 아빠가 골병들겠어. 다음에 모시고 갈 때 무조건 진찰받으시라고 해.

어제 아침에 다시 그 얘기가 나왔다. 무딘 건지, 모른 척하신 건지, 그 숨찬 얘기는 몇 달간 쏙 들어갔었는데, 이후로 다행히도 꾸준히 진찰받으러 다니시는 분이 아빠 병명도 모르면 어떡해. 조금 늦은 밤, 아버지가 집에 오시고, 다녀온 병원 진료 기록지인지 무슨 서류들을 러닝셔츠 바람으로 굳이 그 상황에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부모님과 앉았다. 엄마는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고. 이름이 어렵다는 아버지의 대답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 생소해서 바로 손에 쥐고 있던 아이패드로 찾아봤다.

십여 년도 넘게 전에 금연한 이래 배가 좀 나온 걸 빼면 아버지는 또래보다 건강한 편으로 생각했는데, 이거 만만히 볼 병이 아니었다. 사람의 폐는 회복되지 않고, 완치하는 병이 아니라 한 번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초기는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글을 봤다. 누구보다 걱정하시겠지만, 표현이 또한 누구보다 무딘 집안의 표정이 왠지 참 싫어졌다. 나랑 같이 헬스장 꼭 등록하고, 약 챙기시고 꼭, 백신들은 다 맞은 거야? 그래, 그래, 알았다. 그런데 왜 이 생소한 병은 서서히 나빠진다고만 쓰여 있는 건가, 원망스럽게. 당뇨처럼.

그렇게 밤 내내, 자료들을 찾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일단 씻었다. 싱숭생숭하고 복잡한 기분이라 동네라도 혼자 한 바퀴 걷기로 했다. 어떤 직업의 성취들이 내 몸과 정신이 한창 밑바닥일 때 죄다 소용없다고 느꼈던 이십 대 후반 어느 시점이 있었고 이제는 내 건강이 아니라 부모님의 그것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노쇠하신 할머니만 나이 드신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만 알았나. 아직도 '애'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새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run and clothe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