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시작하며 내가 알게 된 것들
고교시절 특별한 사고 한번 치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남들과 다르지 않게 수능을 통해 수도권의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특별할 것 없는 나의 생은 계속되었고, 남들 다하는 취업 준비를 거쳐 중소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는 적당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며 남들이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다다를 때쯤 결혼을 하고, 결혼 10년 차인 지금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위 궤적만 보더라도 지금까지 나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 사회와 제도가 처놓은 가이드라인에 충실히 따라 살아왔으며, 그 안에서 궤적을 벗어나는 일탈은 허락되지 않는 금도로 여기며 나름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 이런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나 스스로를 ‘반쪽 모범생’이라 부르고 싶다.
자기 주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잘 해내는 모범생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는 못했다. 누군가의 지시와 가이드라인에 따라 충실히 수행하는 편에 모범적이었다. 그래서 완전하지 못한 ‘반쪽만 모범생’이었다. 그렇기에 새로움을 개척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갖기도 매우 어려웠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입시제도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눈 앞에 그려져 있는 선을 충실히 따르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회사에서도 선배가, 회사가 요구하는 업무를 무리 없이 수행해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범생이었다. 만약 눈 앞에 선을 그려주고, 그 선을 잘 따라 가는지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힘겹게 누군가의 지탱과 이끌림을 따라야 했던, 그리고 간신히 앞으로 충실히 나아갔던 반쪽 모범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반쪽 모범생은 주위에서 보기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반쪽 모범생으로 20년을 넘게 살다 보니 커다란 벽에 다다른 기분이 든다. 어느 날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삐뚤빼뚤하긴 했지만 나름 가이드라인을 잘 따라온 듯해 보인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법도 한데, 그렇기보다는 많은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지?’, ‘선을 벗어나지 않은 지금 나는 행복한가?’, ‘앞으로는 누가 계속 나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지?’ 너무 많은 불안감과 혼란이 머릿속을 채운다. 충실히 가이드라인을 따르다 보니 나는 너무 수동적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해본 적도,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시작해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저 눈 앞의 숙제만을 열심히 해결하다 보니 이제는 지쳐버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금세 서글퍼진다.
이런 생각들도 40대를 맞이하고 1년을 보냈을 때까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초 회사에서 진행한 ‘2020년 나의 버킷리스트’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나는 ‘1분 동안 피아노 연주하기’라는 목표를 적어냈다. 내게 피아노는 그저 로망이었을 뿐 한 번도 배워보거나 배우려는 시도도 하지 못했던 하얀 눈길 같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이것이 다짐이 주는 효과일까? 연말까지 버킷리스트 달성을 위해 연습곡을 선정하고 악보를 찾으며, 손으로 계이름을 가리켜가며 피아노를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하고 옹알이 끝에 ‘엄마’를 외치는 감격적인 첫 시작을 바라만 보았지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언가를 시작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피아노는 시작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피아노를 독학으로 시작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고 도전 욕구가 생겨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주체성에서 오는 높은 자존감이다. 거의 5개월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악보는 당연히 볼 줄 모르며, 나의 양손은 아직도 건반 위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면 어떠한가? 나와 피아노는 배움과 도전이라는 멋진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씩 음이 연결되어 비로소 내가 알만한 멜로디로 화음이 맞춰지는 순간 그 어느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과 뿌듯함을 느낀다. 손은 경련이 일기 일보직전이지만 피아노 앞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나는 이미 이루마나 조지 윈스턴에 빙의되어 있다. 연말 버킷리스트 결과 발표 시 1분을 완성하기 위해 시작한 피아노였지만, 지금의 연습 과정 1분 1초가 너무나 값진 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
40여 년만에 느껴본 자발적 시작의 매력과 오롯한 나의 선택이 주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내가 선택한 피아노 연습곡은 [캐논 변주곡]이다. 이번 피아노 연습을 시작으로 앞으로의 나의 삶에도 변주가 일어날 것만 같다. 이제는 눈 앞의 가이드라인만을 바라보지 않고, 내 안의 이끌림을 더욱 깊이 관찰해보려 한다.
반쪽 모범생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