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비행기가 보이는 여의도 공원의 정문에서 우리의 목적지인 ‘잔디 마당’까지는 길고 긴 콘크리트 길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주임님은 말했다.
“선생님 조심해 여기서 넘어지면 아이들 무릎 다 까져.”
그 순간 나의 양 손에 의지하고 있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들이 넘어지는 것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넘어져서 다치는 것이 싫었다.
아이들이 넘어질 때면 빠른 속도로 다가가 무릎을 확인했다.어떤 날에는 넘어져서 생긴 것이 분명한 상처 자국이 보였다.
“휴 다리에 힘을 주고 걸어야지.”
연고를 발라주곤 한숨쉬며 말했다.
나는 어릴 때 잘 넘어지는 아이였다.
넘어지는 이유도 다양했는데 자전거를 타다가 혹은 뛰다가, 앞을 안 보고 걷다가
그 결과 내 무릎에는 어린 시절 다쳐서 생긴 상처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누군가 나에게 왜 긴치마만 입느냐고 물어본다면 겉으로는 그 이유를 개인의 취향이라고 대답하겠지만 속마음은 못생긴 무릎을 보여주기 싫어서이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잘 넘어지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내 앞을 지나갈 때면 나는 넘어지나 안 넘어지나를 유심히 살펴봤고 혹시나 넘어질 때에는 바로 일으켜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했다.
함께 손을 잡고 어딘가를 갈 때면 아이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그 아이 생각이 났다. 말을 참 예쁘게 하고 겨울왕국의 엘사를 좋아했던 그 아이,지금은 넘어지지 않고 잘 걷고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다 왜 그때 “넘어져도 괜찮아.”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아이들이 실패의 경험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넘어지기도 전에 먼저 가서 일으켜주려고 했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도움을 주었다.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시행착오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나날들이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잘 안되면 다시 해보면 되고
실패하면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 역시 모르고 있었다.
넘어지는 경험을 충분히 겪은
그 아이는 지금은 어딘가에서 마음껏 뛰어다니고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