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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Dec 10. 2023

달팽이에 대한 고찰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재미없는 수업시간, 한문선생님이었는지 역사선생님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좋아하는 노래라면서 패닉의 ‘달팽이’를 추천해 주었다. 왜 추천을 해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성실한 학생답게 노래를 찾아서 들어보았고 첫 느낌이 좋아서 한창 자주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큼한 여중생과는 맞지 않는 살짝 아재스러운 노래였는데도 좋아했던 것이 신기하다.  

그 노래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노래의 첫 가사는 ‘집에 오는 길이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인데 직장에서 돌아오며 힘겨운 발걸음을 뗄 때 이 노래가 그렇게 생각나서 속으론 읊조리곤 했다.   

  https://youtu.be/zraW-fU00zI?si=f6q4_y8BA4Qjlcjf

살짝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보자면, 졸업 후 일하던 첫 유치원에서 아이들이랑 길을 걷다 우연히 나뭇잎 위를 꼬물꼬물 움직이는 달팽이를 발견했다. 아이들이 “달팽이 키우고 싶어요”라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길래 내키진 않았지만 함께 키우게 되었다. 달팽이를 키우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는데 생각보다 똥을 자주 싸서 주기적으로 채집통을 닦아주어야 했고, 달팽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서 준비하는 것도 은근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그 달팽이에 매료되었다. 하루종일 작은 채집통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달팽이가 귀여웠고 식사를 주면 남김없이 먹는 모습에 더욱 애착을 느꼈다.  


결국 유치원을 퇴사할 때 달팽이를 두고 올 수 없어 나의 방으로 데려왔고 몇 개월동안 집에서 달팽이를 키웠다. 그때쯤 우리 집을 놀러 온 친구에게 달팽이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친구는 살짝 이상한 시선으로 보기는 했던 것 같지만 마음씨가 착해 나의 어처구니없는 달팽이 자랑을 다 들어주었다. 우린 그날 달팽이 채집통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팽이를 언제나 사랑했지만 바쁘면 조금 소홀해질 때도 있었다. 채집통을 살펴보지 않은지 3~4일이 지났을까? 문득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채집통 안을 살펴보니 나뭇잎 사이에서 축 늘어져 죽어있는 달팽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달려가 “달팽이가 죽었어”라고 울먹이며 말했고 엄마는 다 큰 딸의 속상함을 공감해 주었다. 한때 작은 즐거움을 주었던 달팽이를 땅에 묻으며 달팽이가 다음 생엔 자유롭고 연약하지 않은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길 기도했다.     


그 후로 달팽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평소에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예쁜 가사가 담긴 동요를 자주 틀어두었었는데, 무려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달팽이의 하루’라는 동요가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https://youtu.be/MwajNi9t0sA?si=yj0x1CJpX3QHOR0h

<달팽이의 하루>
보슬보슬 비가 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달팽이는 비 오는 날 제일 좋아해
빗방울과 친구 되어 풀잎 미끄럼을 타볼까?
마음은 신나서 달려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야호 마음은 바쁘지만 느릿느릿 달팽이
어느새 비 그치고 해가 반짝
아직도 한 뼘을 못 갔구나
조그만 달팽이의 하루      

멜로디가 아름다워서 가사에 집중이 잘 되었고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듣고 있던 난 노래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향해 고백하듯 한마디를 했다.  

“선생님은 달팽이였어.”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말에 당황하는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지만 역시 아이들을 순수했다. 자신들도 달팽이가 되고 싶어 바닥을 꼬물꼬물 기어 다니기 시작했고 여러 마리의 귀여운 달팽이들이 기어 다니는 교실에서 혼자 진지하게 동요를 듣고 또 들었다.


어떻게든 공감을 받고 싶었는지 퇴근할 때 함께 있던 동료 선생님을 붙잡고 동요를 들려주며 말했다.

“우리 꼭 달팽이 같지 않아요?”

다행히 내 주변에는 다들 착한 분들밖에 없는지 동료교사의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질문에도 선생님은 친절한 미소만 남긴 채 서둘러 퇴근을 했다.     

달팽이는 느리고 연약하다. 하루 종일 열심히 움직이지만 속도가 느려서 그리 멀리까지 도달하지도 못한다. 어쩌면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움직이지만 변화를 이루기에는 아직은 한참 먼 나 자신을 보며 달팽이와 같다 느꼈던 것은 아닐까? 달팽이노래를 들으며 스스로를 떠올랐다는 것에 자조적이지만 싱거운 웃음을 나왔다.      

세상에는 달팽이와 같은 사람도 있겠지
세상에는 지렁이와 같은 사람도 있겠지

세상에는 개미와 같은 사람도 있겠지

작고 연약한 생명체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내 머릿속을 꽉 채웠던 달팽이를 놓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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