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희 감독전 <파랑새> 후기
에세이집을 독립출판하기로 마음먹고 글을 쓸 때, 같은 문장을 썼다 지우길 반복하게 만든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걸 읽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까?' '나만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글쓰기 수업을 듣다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얘기기도 했다. "읽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입니다." 당연히 그것만이 좋은 글의 척도는 아니겠지만,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글을 오직 나의 시선에서만 볼 수 있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할 수는 없으니 이게 대체 제삼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두려웠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썼다 지우고, 때로는 초안을 통째로 들어내고 다시 빈 화면을 마주하며 이러다간 영영 책을 낼 수 없겠다는 절망감까지 가 닿았다. (그럼에도 결국 책을 완성한 건 그런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두렵더라도 완성에 의의를 두기 위해 미리 돈을 받고 예약 판매를 한 덕분이다. 역시 최고의 채찍질은 돈이 오고 가는 거래를 만드는 것..!)
자기 자신 속에서 소재를 길어내는 것이 창작의 출발이라면, 이건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창작자들이 마주하는 고민이 아닐까? 어제 다녀온 윤소희 감독님의 <파랑새> 감독전에서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런 고민을 풀어가는 과정을 만났다. 상영된 7개의 영상 중 대부분은, 감독전 소개글에 적힌 표현을 빌리자면 "자아에 대한 탐구와 행복에 대한 집착을 멈출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시선이 온통 저에게로 쏠려 자기연민에 헤어나오지 못했"던 시절을 담고 있었다. 연출, 촬영, 나레이션 각본 등 영화의 거의 모든 요소들을 감독이 직접 준비했고, 탐구하는 주제나 렌즈가 비추는 대상 역시 대부분 감독 자신이다. 대중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였다면, GV에서 질문을 하신 어떤 분이 잘 짚었듯 '여성' 내지는 '청년'과 같이 굵직한 이슈를 중심으로 촘촘히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 스스로가 상영회의 시작부터 힘주어 말했듯, 오늘의 영상은 그러한 카테고리 속의 보편적 누군가가 아닌 '윤소희'라는 개인에 대한 기록이자 분석이었다. 그런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관객을 모으고 장소를 빌린 감독님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그녀 속에서 발견하길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무엇일까?
나는 감독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할 수 없겠으나, 내 시선에서 영상을 관람하며 나와 접점이 있다고 생각된 부분들에 대한 감상부터 풀고자 한다.
두 영상 모두 속이 비치는 얇은 베일을 뒤집어쓴 감독 자신이 베일을 벗어나려는 듯, 혹은 끌어당겨 자신을 덮으려는 듯 조용히 몸부림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몸을 덮어 외부와 차단시키지만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얇은 천의 재질이 마치 태아의 양막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몸속에서 나를 안전히 감싸지만, 동시에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찢고 버려야 하는 존재. 영원하고 완전하지만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정적이고, 그래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보호 상태에 머무르려는 욕구와 위험하지만 역동적인 세상의 가능성에 자신을 던지고 싶어 하는 욕구의 충돌이 느껴졌다. 내가 아닌 타인은 언제나 완벽히 이해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만큼, 이들에게 날 것의 나를 드러내려면 예상치 못한 시선과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용기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면서 괴로워하던 나 역시 타인이 나를 봐주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꺼내기 부끄러워하며, 아주 얇은 장막으로 자신을 덮고 꿈틀거리던 끝에 그 막을 걷어내고 책을 내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베일 아래에서 몸부림치던 감독의 모습이 마냥 비겁하거나 수동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속박이나 고민을 당장 박차고 나오지 못할지언정, 그런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가득 채운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이자 영감이었다.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다시 파주로 거처를 옮기며 정착을 고대하던 감독님의 모습을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훔쳐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작품의 시선을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옮기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끝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면서, 당시의 감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낸 게 마음에 걸릴 때도 있었다는 감독님의 코멘트가 기억난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누누이 들었던 것과 같이, 사람들은 상대방이 솔직하게 내려놓고 드러낼수록 더욱 강하게 이끌린다고 믿는다. 이 영상을 보는 나의 마음이 그랬다.
나 역시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으로 전국을 순회한 적이 있다. 마음을 둘 수 있는 공간, 사람을 찾기 위해 금요일 저녁이면 퇴근 버스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최대한 멀리 떠났다. 그렇게 닿은 곳에는 나에게 위안을 주는 남해 바다, 혹은 나를 절대 미워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나마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기분에 취해 매주마다 여정을 반복하다 보니 처음 여행을 추동했던 불안이 다시 한번 나를 잠식했다. 여행의 흥분이 일상이 돼버리자 처음과 같은 황홀함이 사라지고, 불안에 쫓겨 도망치듯 돌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초라해져 발길을 끊었고, 내 몸이 어디에 있든 내가 떼놓고 싶어 하는 스스로는 지구 끝까지 따라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걸 비교적 편안하게 수긍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나는 정착에 집착하지 않는 평온함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렇게 되자 어디에서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방랑벽을 치유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외부 환경이나 만나는 사람을 통해 채우려던 결핍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랑으로 채울 수 있게 되어 가능했던 것 같다.
감독님은 이 영상의 제목을 '윤슬은 언제나 반짝'이라고 붙이고, 부산 바닷가의 파도가 부서져 빛나는 모습을 여러 번 반복해 보여준다. 윤슬은 곧 잔물결이고, 잔물결은 동적인 상태의 물에서만 일어난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존재는 불안할지언정 동시에 고유한 반짝임을 지닌다. 과거의 감독님과 나 자신이 한참을 흔들리며 휩쓸리던 시절을 마냥 예쁘게만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는 빛나는 순간들을 기억하는 건 분명하다. 비록 그들이 끝내 내면의 불안을 완벽히 잠재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내가 만난 반짝이던 도시와 사람들을 나는 기억하고 간직한다. 감독님도 그런 마음으로 제목을 고른 것일까?
이 영화의 또 다른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감독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생각을 물은 뒤 이를 녹음하여 영상에 입혔다는 사실이다. 살면서 남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진짜' 생각이 궁금해서, 술자리에서 한 잔 거하게 걸치고 진실게임 비슷한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체면이나 눈치 때문에 숨기고 있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한 개쯤 있을 거고, 그건 열어보기에 두려우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끌어당기는 금기와도 같다.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 수 있다면, 자신과 타인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까? 혹은 그들을 더욱 미워하게 될까?
대학생 시절, 내가 몸 담았던 동아리에서는 여름 농활마다 '인민재판'이라는 행사를 개최했었다. 문자 그대로 한 명을 재판대에 올려두고 평소에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견을 모두 쏟아놓는 자리였다. 워낙 빡빡하게 돌아가는 동아리라 감정이 쌓일 일이 많았기에, 그런 자리에서 고운 말 미운 말 가리지 않고 주고받아야만 뒤끝 없이 끈끈해질 수 있다는 기조였다. 나에 대한 타인의 의견과 나 자신을 일치시킬 정도로 자아가 흐릿했던 나에게는, 차라리 진짜 인민재판처럼 사형 선고라도 받아서 이 모든 걸 잊을 수 있길 바랄 정도로 꽤 끔찍한 시간이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당시 내게 던진 말들을 이 영상과 같이 기록하고 되돌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면 친구들의 모든 말에는 나를 걱정하고 돌봐주려는 애정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슬쩍 보기에는 야무지고 당당해 보이지만, 그 동아리처럼 사람들을 깊게 사귀는 공간에서는 물러 터지고 불안한 내면을 들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속내를 금방 알아보고 이를 덮어 감추기 위한 나의 '센 척'을 가감 없이 지적했는데, 그게 꼴 보기 싫다는 게 아니라 그걸 벗어던지고 나 역시 시원하게 솔직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말했을 것이다.
<윤슬은 언제나 반짝>에서 등장하는 인터뷰이들 중 일부는 나의 동아리 동기들과 같이 꽤나 뼈 때리는 말들을 서슴없이 한다.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감독의 모습을 지적하고, 그렇게 바라는 것처럼 정착을 하고 싶으면 남자친구를 사귀든 결혼을 하든 말뚝을 박으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 조언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견을 차치하고, 이런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는 감독님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나 자신이 보는 내가 온전하지 못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나보다는 훨씬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타인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그 조언에 내가 동의할 수 있든 없든, 타인이 보는 나 역시 나에 대한 약간의 진실을 언제나 담고 있기에 스스로를 직시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날카로울지언정 유효한 평가를 해주는 사람의 존재 역시 각별하고, 지금의 내가 10년 전의 인민재판 동지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처럼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기록하는 것 역시 대단한 용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과정을 겪는 동안 스스로가 나약하고 허무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더라도 말이다.
감독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영화는 이전까지의 영상들이 집중하던 자기연민에서 헤어 나와 "사랑받고 있었지만 정작 밀어낸 건 저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계기라고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키웠을 때 즈음의 나이가 되었을 때, 감독은 어머니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던 강릉으로 떠나 당시에 살던 동네를 돌아본다. 몰라보게 멀끔해진 시장을 보며 감탄을 하다가, 20년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옛 집을 발견하고 감상에 젖기도 한다. 그 집에는 감독이 세 살 배기일 때 굴러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한 계단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어머님은 생생하게 떠올리는 그날을 감독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어린 시절에 잠시 몸 담았던 곳이지만 굳이 생일을 맞아 방문한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지금의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그게 나의 시간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그렇기에 더듬어보고, 되짚어보고, 그곳에서 나에게 생명을 주고 나와 시간을 보낸 가족과 함께 둘러보고 싶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유년기를 강원도에서 보냈었다. 강릉은 아니었지만 차를 타고 20분 남짓 달리면 새파란 바다를 만날 수 있는 도시였다. 나도 감독님과 마찬가지로 모래성을 만들고 물에 발을 담그며 기뻐하던 유년기를 선명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바다 곁에서 수많은 나날을 보냈기에 아직까지도 바다를 보면 가슴이 탁 트이고, 마음이 자유로우면서도 고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던 나의 어린 시절을 바다가, 그리고 나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기에. 이 사실은 내게 그 어떤 의식적인 기억보다도 중요하다. 내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유년기의 장면들은 어머니로부터 손찌검당하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아프게 각인된 시절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순간이 불행했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바다를 만날 때마다 기억 저편에 남아있던 행복의 잔상이 나를 다독여준다.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어떤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불행과 행복, 나아가 내가 세상에 던져진 탄생의 순간까지도 모두 나의 과거이자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된다.
영상의 마지막,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감독의 어머니는 감독을 낳던 날을 회상한다. 수술대에 올랐을 때에 피자 생각이 절실했다는 대목에서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생살을 자르는 느낌이 생생했고 무언가 쏟아지듯 나온 게 자신의 아이였다는 걸 설명에 마냥 아름답기만 하지 않은 출산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몸을 찢는 고통을 감내하고, 가세가 기울어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고해 속에서 나를 낳고 키운 걸 어머니는 후회하지 않을까? 내가 나의 어머니에게 항상 하고 싶었던 질문을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던진다. 그리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대답은 세상 모든 어머니라면 누구나 할 법한 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당연하지 않은 숭고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다시 낳아야 한다면 낳겠다는 선언, 너를 키우는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모두 좋았다는 고백. 정확한 대사를 인용할 수 없지만, 작은 머뭇거림도 없는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스크린 밖의 나까지 가득한 위로를 얻었다. 나의 어머니 역시 비록 그 모양은 다를지언정 나를 그녀의 방식으로 한없이 사랑했을 거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7개의 영상을 모두 시청한 뒤, 낯선 타인 앞에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드러낸 감독이 그 과정에서 망설임이나 두려움을 느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GV에서 이 질문에 대한 뜻밖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감독님은 자신과 가까운 타인일수록 스스로를 보여주기 어렵고, 반대로 자신과 관계가 깊지 않은 낯선 이에게는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때로는 훌쩍 놀러 간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새벽 4시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연락처를 나누지 않은 채 헤어진다고도 말했다. 한때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나의 곪은 속내를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여행을 가더라도 꼭 독방을 고집하며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말이었다. 당시의 내가 모두를 붙잡고 꼭 그렇게 무거운 얘기를 하려 했던 건,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안아주지 못해 그 몫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보다 내면이 더 단단해진 지금은 그 갈증이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를 할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는 건 아니다. 나도 윤소희 감독님이 지금까지 그래 왔듯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내면을 성찰하는 과정을 앞으로도 꾸준히 전시할 것이다. 그 안에 숨겨둔, 내가 이미 정해둔 나에 대한 정답을 타인이 발견하고 인정해주길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에 담겨있는 대상이자 그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주체가 모두 그렇게 하길 바라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의지를 실현하며 나는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울수록 솔직해지고, 솔직할수록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감독전을 보고 내가 세상에 내놓고 안달복달했던 나의 첫 책에 대해 전보다 큰 자신감을 가지고, 서두에 던졌던 질문에도 어설픈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의 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무래도 후자보다는 전자를 소망할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두를 만족시키거나 공감시킬 수 있는 글만을 고집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타인을 어설프게 만족시키기 위해 치장한 자신보다는 가감 없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더 큰 울림을 주는지, 윤소희 감독전 <파랑새>를 통해 절감했기 때문이다.
+ 덧: 워낙 장황한 후기를 써서 감독님과 나의 관계를 궁금해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윤소희 감독님을 알게 된 건 나의 반려휴먼이 감독님과 인스타그램 맞팔을 하다가 감독님이 올리신 스토리에 좋아요를 눌렀고, 근데 그게 알고 보니 감독님이 모델을 구인하는 글이었고, 한국어가 짧은 반려휴먼은 그걸 뒤늦게 알았지만 이렇게 된 거 모델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촬영에 응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감독전에 초대를 받았는데 동반인을 데려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나도 따라가게 된 것이다. 물론 감독전에 가기 전에 감독님 인스타그램을 훔쳐보며 그녀의 그림, 쉼없는 창작욕, 그리고 상영회를 기획하는 추진력에 내적 감탄을 하고 소심하게 좋아요만 누르기는 했었다. 분량만 보면 금전적 대가를 받고 원고를 청탁받은 사람 내지는 악개 덕후처럼 느껴지겠지만.. 후자만 팩트입니다. 팬이에요, 감독님! (그런 감독님이 현장에서 나를 알아봐주셔서 그저 행복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