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수리남> 후기 (1)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믿고 볼 수 있는 흥행 배우들, 범죄극은 널리고 널렸지만 그 배경이 국내가 아닌 해외라는 점, 그리고 어느 정도 전개가 예측되어서 뜨개질하면서 곁눈질로 흘끗흘끗 봐도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딱 그 정도만 기대하고 봤더니 그 정도로만 좋았다. 그런데 이제 신선한 스파이 설정과 조우진의 재발견을 곁들인.
처음에는 첫 화에 나레이션이 쭉 깔리면서 강인구(하정우 역) 인생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연출이 좀 띠용-했지만, 극을 다 보고 나니까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기는 했다. 이 드라마의 찐 주인공은 강인구고,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강인구가 보여주는 모습은 초반에 요약된 그의 인생과 착실히 맞닿아있다. 마약 조직과 국정원에 양다리를 걸쳐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고 주변에 총알과 주먹이 날아다니는 지옥 속에서도 그는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 흔들리지 않는 얼굴의 근원을 설명하려면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는 연출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 일관성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기에 앞서, 강인구의 한결같은 목표가 '내 손으로 돈을 벌어 가난을 탈출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자수성가형 가장'이라는 것부터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유도를 배운 것도 학교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고, 이를 그만둔 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유도를 했기 때문에 깡패들과 몸싸움이 가능하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설정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깥에서 쓰리잡을 뛰며 돈을 벌면서 살림까지 책임지기엔 너무 손이 모자랐던지라, 그는 아는 여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안일을 맡아줄 '안사람'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표현은 '결혼을 하자'는 것이지만, 일하는 동안 동생들만 지내는 집안이 개판이 된 걸 보고 전화로 와이프 될 사람을 모집하는 상황에서 어떤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가 수리남에 가기로 한 것도 '가장으로서 지긋지긋한 인생을 탈출해서 새 삶을 살아보자'는 의도가 아니었다. 물론 삶의 무게에 시달리고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에 지겨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홍어 사업에 뛰어드는 궁극적인 이유는 전보다 힘을 덜 들이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집안의 경제를 홀로 책임지는 부담에 대한 고찰, 삶 자체에 대한 회의, 이로 인한 충동적 일탈 등의 요소가 가미되었다면 강인구가 좀 더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극의 흐름상 이건 불필요했다고 판단했나 보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그런 자잘한 고민을 곁들인 사람이었다면 국정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받았더라도 중간에 양심에 대한 고찰을 하거나 이상 행동을 하면서 스토리를(혹은 장르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강인구가 굉장히 납작한 캐릭터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 드라마는 강인구를 '돈 벌려는 가장'이라는 정체성에 올인시킨다. (물론 '능청스럽고 사업 센스가 있는 장사꾼'이라는 면모도 있지만, 그건 그 자체로 동기나 목적이라기보다는 성공한 가장이 되기 위해 운용하는 하나의 능력 내지는 성격에 가깝다. 이렇게 자칫 뻔하고 지겨울 수 있는 캐릭터를 하나도 지겹지 않게 소화한 하정우 연기력 무엇..)
마약 거물 전요환(황정민 역)의 덫에 걸려 감옥에 갔다가 국정원의 미션을 받고 수리남으로 복귀한 강인구는, 그저 홍어로 큰돈 땡겨보려던 수리남 입국 초반의 강인구와 똑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는 분명 전에 없던 배신감과 분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정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다시 전요환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 건, 돈만 보면서 전진하던 과거의 행보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에게는 국가를 위한 봉사 정신, 혹은 악을 추방하려는 정의감도 없다. 국정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국정원이 제시한 액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고(그것마저 초반에 흥정으로 조정한다), 그걸 통해 벌 수 있는 돈과 전요환과 손을 잡아 벌 수 있는 돈을 비교하며 흔들리거나 국정원의 상여금 얘기에 귀가 팔랑 거리기도 한다. 물론 중간중간 전요환이 이끄는 교회가 신도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걸 보고 전요환을 잡아넣어야 한다는 감정이 커지기는 하지만, 그건 사건 전개에 박차를 가하는 요소일 뿐이지 그에게 있어 전요환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주요한 동기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여기서 내가 감탄한 포인트는 바로 강인구가 이런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고, 굳이 거짓을 곁들이지 않으면서도 미션을 성공시켰다는 점이다. 전요환에게 접근할 때 그는 비굴하게 조아리면서 전요환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홍어 사업이 망했고 그 과정에서 친구가 죽었다는 점에 대한, 전요환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만 보면서 마약 사업을 할 의지 역시 전요환에게 어필한다. 사적 감정을 제쳐두고 비즈니스 앞에서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배포, 사업가로서는 최고의 자질이다. 전요환도 그걸 알아봤기 때문에 초반에는 의심을 거두지 못해도, 뒤로 가서는 같이 골프를 치며 높은 포지션을 제안할 정도로 강인구를 신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강인구는 국정원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욕망에 솔직했고, 그게 작전의 성공에도 기여한 셈이다. 국정원과 일할 때에도 그의 태도는 다르지 않다. 일반적인 스파이물이었다면 전요환 앞에서는 살살 기다가 국정원과 통화할 때에는 비장한 요원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강하게 대비시키지 않았을까? 하지만 강인구는 국정원과 전요환 앞에서 한결같이 수지타산을 계산하고 자신의 몫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행동한다. 이런 모습을 똑같이 보여주는데도 하나도 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 자체가 신선했기에 드라마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분량 조절에 실패한 관계로 2편에서 계속됩니다.
*이미지 출처
- YTN: https://www.ytn.co.kr/_ln/0106_202209150839332719
-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208116938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