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계획적인 여자거든요

MBTI완전 J

by 북칼럼니스트 윤정


3개월 만의 올레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떠날 때마다 설레지만 오랜만의 여행은 몇 배는 더 설렌다. 이번 올레의 주제는 수국이다. 겨울의 제주가 동백이라면 여름의 제주는 수국이니까. 탐스럽기 그지없는 수국. 수국은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름 꽃이지만 제주의 수국은 특별하다. 매우!


제주에서는 김밥도, 커피도, 민들레도 하다못해 길가에 있는 흔한 돌멩이도 특별하다. 모두 서울에 있는 것들인데 제주의 것은 특별하다. 그렇게 따지면 나에게 제주는 모두 특별하다. 그렇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빠를지도 모르겠다. 왜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뿐. 제주이기 때문에. 제주에 잠시 살았을 때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제주를 사랑하게 될 줄을. 또 이렇게 자주 제주를 들락거릴지. 지나고 나니, 떠나고 나니, 헤어지고 나니 더욱 소중한 것이 마치 다정했던 구 남친같다.



비행기값도 저렴했고, 렌터카도 완전 거저로 예약했다. 일기예보에 비소식이 있지만! 그래도 좋다. 나는 제주의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처럼 제주의 날씨는 거짓말을 자주 한다.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섬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갈 때마다 예보가 맞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예보를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일기 예보에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널따란 하늘과 바다가 한 쌍으로 푸르를 테니 그날은 분명 좋은 날이 될 것이다. 흐린 날에는 영어의 'blue'가 '푸르다'의 뜻 말고 또 어떤 뜻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 오는 날 제주의 운치는 그 어느 곳도 비교할 수 없다. 제주는 날씨와는 무관한 곳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방 속에 작은 우산을 하나 넣고 출발했다.






우리의 계획은 성산읍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해 혼인지를 거쳐 온평포구에서 끝나는 2코스를 걷는 일정이고, 혼인지에서 수국을 만끽하기로 했다. 가면서 커피와 빵을 살 곳을 검색해 놓았고, 2코스 시작점 근처에 주차할 곳과 끝까지 다 걷고 나서 차를 세워둔 곳으로 오는 버스 노선도 미리 찾아놓았다. 대략적인 시간 계산까지 철저하게 해놔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걷고, 오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당일치기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그. 런. 데.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진다. 빗방울이 제법 굵은 게 심상치 않다. 그래도 일단 2코스 시작점으로 가보기로 했다. 비는 점점 더 왔다. 비를 맞으면서 걷기에는 많은 양의 비이다. 걷기를 포기해야 했다.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가 그치면 바로 걷기로 마음먹고 다른 일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올레 여행을 함께 하는 동생과 나는 MBTI 맨 끝이 J이다. 계획적인 유형이다. 꼼꼼하게 세운 계획에 변수가 생겨도, 미리 생각해 온 차선책이 없어도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동선에 마침 맛있는 베이글 집이 있다기에 핸드폰 어플로 대기를 걸어놓고 이동했다. 서울에서도 대기시간이 길어 못 먹어본 베이글을 제주까지 와서 먹어보다니,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2코스를 걷지 못한 대신 우리는 맛있는 베이글을 먹고, 제주를 너무 사랑했던 김영갑작가가 남긴 사진들을 보러 두모악에 갔다. 근처에 있는 혼인지에도 들렀다. 그러고 보면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었다. 우산을 쓰고 걸었지만, 2코스에 해당하는 혼인지 옆 길을 잠시 걸었고, 혼인지에서 수국을 차고 넘치게 눈에 담아 왔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고, 철저하게 지킬 거라고 다짐해도, 내 의지와 능력과는 별개로 계획은 흔들린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매년 새해가 되면 부푼 소망을 적는다. 매일을 무계획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삶은 내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그날의 우리처럼 비를 만나면 가끔은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방향을 바꾸기도 해야 한다.


우리가 세운 계획에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비스므레 옆길로 다녀온 여행. 예상치 못했던 기쁨도 맛보았던 여행.



제주는 늘 그렇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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