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숨은 조력자, 다른 향을 돋보이게 만드는 분자
만약 20명에게 어떤 향을 맡게 하고 무엇인지 물었을 때, 20가지 다른 대답(고구마 소주, 고추장, 장미, 담배...)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바로 β-다마세논(β-Damascenone)이 그런 마법 같은 분자입니다. 다마스커스 장미에서 처음 발견된 이 화합물은 커피와 홍차의 핵심 향기 성분이면서도, 그 자체에서는 커피나 홍차 향이 나지 않는 신비로운 특징을 가집니다. 와인에서 β-다마세논은 전면에 나서서 자신을 뽐내기보다, 다른 향기들을 조율하고 무대를 꾸며주는 '숨은 조력자'의 역할을 합니다.
β-다마세논(C₁₃H₁₈O)은 카로티노이드(carotenoid)에서 유래한 노르이소프레노이드 케톤(norisoprenoid ketone) 계열 화합물입니다. 자체적으로는 익힌 과일(cooked fruit), 이국적인 꽃(exotic flower), 장미(rose)와 같은 복합적인 향을 가집니다. 이 향의 감지 역치(Odor Threshold)는 약 2 ng/L 수준으로 극도로 낮아, '고영향 화합물(High-Impact Compound)'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β-다마세논의 진정한 힘은 다른 향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옵니다. 와인 속 다른 과일향 에스테르(ester)와 만나면, 그 과일 풍미를 훨씬 더 풍부하고 강렬하게 느끼도록 증폭(enhancement)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반대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에 존재하는 메톡시피라진(IBMP)의 톡 쏘는 채소 뉘앙스를 부드럽게 가려주는(masking) 역할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화합물의 감지 역치는 와인의 종류에 따라 크게 달라져, 레드 와인에서는 일반 용액에서보다 1,000배나 둔감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β-다마세논의 잠재력은 포도밭의 햇볕에서 시작됩니다. 네오크산틴(neoxanthin)과 같은 카로티노이드가 분해되며 생성된 전구체(precursor)는 주로 포도 껍질(skin)과 과육(flesh)에 배당체(Glycoside)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향이 없는 전구체들은 발효와 병 숙성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가수분해되어 향을 내는 '자유형' 분자로 방출됩니다. 이 때문에 병 숙성 중 그 농도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자유형 상태의 β-다마세논은 이산화황(SO₂)과 반응하거나 산화되면서 감소하기도 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띱니다. 때로는 조기 산화된 와인에서 건자두(prune)나 건초(hay) 같은 향의 일부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β-다마세논은 특정 품종에 국한되지 않고 매우 넓은 범위의 와인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샤르도네(Chardonnay)와 리슬링(Riesling)의 복합미에 기여하며,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피노 누아(Pinot Noir) 같은 레드 와인에서도 바람직한 아로마 특성과 긍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요 연관 아로마:
꽃(Floral): 장미(Rose), 이국적인 꽃(Exotic Flower)
과일(Fruity): 조리된 과일(Cooked Fruit), 자두(Plum), 라즈베리(Raspberry), 포도(Grape)
달콤함(Sweet): 꿀(Honey), 설탕(Sugar), 캐러멜(Caramel)
기타(Other): 나무(Woody), 담배(Tobacco), 허브(Herbal), 후추(Pep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