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궤도 5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속이 상해 컴퓨터도 제대로 안 끄고 홀연히 회사 문을 나섰다. 이번 회사는, 적어도 회사는 좋은 편이다. 여러 장점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절세권'이라는 점이다.
곧바로 지하철을 탈 수 없을 만큼 무너질 때, 혹은 아쉬우리만치 날이 좋을 때, 가까운 봉은사 앞을 거닐 수 있다. 불교가 모태신앙인 나는 매주 불공을 드리는 독실한 불자는 아니지만, 1년에 한 번 초파일에만 나가도 대충 신자로 쳐주는 이쪽 동네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제법 믿음이 있는 편이다.
오늘은 일주문,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안까지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삼배는 부처님께 하는 세 번의 절로 합장보다 조금 더 격식을 갖춘 인사다. 늘 '다녀갑니다'의 의미로 삼배를 올리고 밖으로 나서곤하는데 오늘은 가만히 자보(방석)를 깔고 앉아 참선을 했다.
말이 좋아 참선이지 그냥 멍때리며 울었는데 조용히 티 안나게 밖에서 마음을 비워내기에 제격이었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드믄드믄 신도들이 있었지만 각자 조용히 자신의 염원을 위해 절하거나 앉아서 기도할 뿐이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나도 그저 안구건종증 혹은 비염에 걸려 눈과 코가 불편히 보일 뿐일게다.
절에 간다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다고해서 결코 자비심이 생기는 건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건 더더욱 어렵다. 그저 터질듯이 가득 채운 미움과 원망의 기운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올 뿐이다. 그럴 수 있는 조용한 장소일 뿐이다.
그러나 퇴근길에 급히 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너무 다행인 점이다. 5분 내 접근가능한 비상대피소랄까. 오늘도 이직욕구를 불태웠지만 꾸역꾸역 퇴사욕구는 비워냈다.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일을 3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1. 돈을 줘도 하지 않을 일
2. 돈이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일
3. 돈이 아니어도 할 가치가 있는 일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돈이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일'에 가깝다.(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동료들에겐 유감이지만)
하지만 잠시 마음을 쉬어갈 힘이 남아있는한, 적어도 도망치기보다는 '돈이 아니어도 할 가치가 있는 일'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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